석사 과정 때 있었던 일이다. 나는 모교 학부에서 같은 전공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한 전일제 대학원생이었고, 내가 소속된 학과가 BK21 사업을 수주한 덕에 매달 수십만원씩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등록금의 일부는 부모가 마련해주었으므로 조교 월급과 자잘한 아르바이트 수입까지 합치면 생활비와 책값 정도는 그럭저럭 마련할 수 있었다.

대학원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조금은 즐거웠다. 매주 소설과 자료를 읽고 분석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말 대잔치’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발표문을 밤새워 작성하고, 내가 나비 꿈을 꾸는 장자인지 아니면 장자 꿈을 꾸는 나비인지 그도 아니면 대학원이라는 불꽃에 겁도 없이 뛰어든 나방인지 헷갈릴 정도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발표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그러고는 강의실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 따위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술을 마시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연구를 하겠다 다짐하고, 다시 읽고, 쓰고, 울고.

ⓒ김보경 그림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끝났다고 생각했던 성장기가 다시 찾아온 기분이었다. 커지는 것이 키나 몸집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매일 밤 뭔가에 쫓겨 절벽에서 떨어지며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꿈에서 깨어나던 시절처럼 지적 성장에 대한 허영 섞인 만족감으로 충실한 나날이었다. 이따금씩 풍문으로 들려오던 대학 사회의 부조리는 나와는 한참 먼 이야기인 것 같았다.  


‘KISS’라는 단어에서 ‘입맞춤’보다 ‘한국학술정보’ 사이트를 떠올리는 데에 더 익숙해진 어느 날, 학과 홈커밍데이가 열렸다. 뒤풀이 자리에서 학부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 제법 사회인 티가 나는 한 학번 아래 후배와 마주앉게 되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나 겨우 나누던 사이였을 것이다. “잘 살았니?” “네, 선배는 대학원 갔다면서요?” 의례적인 대화가 오가고, 어느새 만취한 후배는 내 정신적 멱살을 틀어잡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선배는 진짜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응? 난 말야, 돈이 없어서 공부 더 하고 싶어도 못 했다고. 알아?”

지금의 나라면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정색하며 화를 낼 것이다. “나, 돈은 많고 꿈은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다.” 또는 넉살좋게 허허 웃으며 “너 요즘 많이 힘들구나,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지”하는 식으로 눙쳐버리거나. 하지만 당시 나로서는 까닭 모를 미안함과 억울함이 겹쳐 “난 그래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린 것이 고작이었다.

혹시 대학원 진학을 고심하고 있다면

그 후배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에게 나는 그날 우연히 마주친, 가장 만만한 한풀이 상대였을 것이다. 그날 내가 느낀 억울함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오해가 사회적 차원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학원, 특히 기초학문 분야로 진학하는 데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학벌 세탁’ ‘취업난으로부터 도피’ ‘학생 신분 연장’ ‘부유층의 지적 유희’ 정도로 전락한 지 오래다. 대학원생의 열악한 처우, 점점 줄어드는 학문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불안한 미래에 대해 불만이라도 제기했다가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는 강력한 반박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대학원 진학과 연구자로서의 삶이 ‘좋아서 하는 일’ ‘스스로 선택한 일’로 프레이밍되는 한, 어떠한 구조적 개선도 불가능하다.

혹시 주위의 누군가가 기초학문 분야 대학원 진학을 고심하고 있다면,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도 될지 망설이고 있다면 ‘집에 돈 좀 있나 보네’라고 생각하는 대신, 그의 용기에 작은 응원을 보내주기 바란다. 우리는 그저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기자명 홍덕구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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