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 6월6일 제62회 현충일 추념사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같이 말했다. 가만히 그 말을 곱씹다가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어가던 반공 만화영화 〈똘이장군-제3땅굴 편〉(1978)을 틀어주던 텔레비전, 6월이면 손수 만든 차트를 들고 나와 북한의 침략 루트를 짚어 설명해가며 반공의식을 고취시켜주었던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 글짓기 대회나 포스터 그리기 대회, 웅변대회 같은 크고 작은 경진대회마다 앞머리에 ‘반공’을 달고 있었던 그 시절의 추억에 피식 웃었다. 대체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에게 “공비가 내려와 아이 입을 찢었다” 따위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시절 어른들은 무엇을 가르치고 싶었던 걸까.

어린아이들에게도 운동장에서 열을 맞춰 줄을 서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무질서했던 자유월남은 결국 패망했다”라고 이야기했던 그 시절, 북한은 한국 정치의 상수였다. 휴전선 너머 북한이 어떤 속내를 지니고 무엇을 획책하는지 알 수 없으니, 일체의 반목 없이 단결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20세기를 통째로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였다. 이 반북 이데올로기는 실제로 일어나는 북한의 도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를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정치적 진공의 공간으로 유지하는 데 악용되곤 했다. 권력자가 정적을 북한 동조자로 몰아 사법 살인을 자행한 1958년 진보당 사건, 세계 사법사에 암흑의 날로 기록된 1974년 인민혁명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학림 사건, 부림 사건 등 권력이 북한 문제를 내부 통치에 악용한 사건들은 굵직한 것들만 적어도 지면이 부족할 만큼 많다. 이런 전략에는 남과 북이 둘이 아니어서, 북한 역시 체제 자체의 모순에 대한 그 어떠한 도전도 미국과 대치 중인 준전시 상황에서 대오를 와해시키는 반동으로 간주하고 숙청해왔다.

김청기 감독의 만화영화 〈똘이장군〉(왼쪽)과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

대중문화 또한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87년까지만 해도 대종상에는 ‘반공영화상’이라는 부문이 따로 존재했고, 외화 수입 또한 우수 반공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만 허가해줬다. 물론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설득만 하면,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줬던 역설적인 제작 환경을 활용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군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실현이 불가능했을 거대 전투신을 연출하면서도 애국의 가치를 설득하기보다는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를 더 짙게 드러냈던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이나 당대에는 심의를 통과하기 어려웠을 법한 공포 시퀀스를 연출한 김청기 감독의 〈똘이장군〉 시리즈(1978~1979), 표피를 걷어보면 사실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 주도의 냉전을 대리하느라 한국인들이 희생된 전쟁이었다는 짙은 환멸을 숨기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걸작 〈짝코〉(1980)와 같은 작품들은 반공영화라는 탈을 쓰지 않았다면 제작 자체가 불가능했거나 제작했다 해도 개봉하지 못했으리라.

이와 같은 몇몇 예외를 빼면, 대중문화에 반영된 북한은 아주 오랫동안 악마화되어야 했다. 북한을 다루거나 한국전쟁을 다룬 콘텐츠들이 제작 과정부터 수많은 검열과 감시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조정래 원작의 소설 〈태백산맥〉을 영화화한 임권택 감독은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대담하면서 그 시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정권 자체는 이 영화 제작에 대해 크게 문제 삼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극우 쪽에서 보이지 않은 엄청난 압력이 있었다. 영화 내내. 내가 해남 가면 사람이 와서 면에서 왔습니다, 하고 촬영 현장에 와 있는 거요. 면에서 뭣 때문에 남의 영화 현장에 오냐고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좌우간 있는 거요. 경찰차를 보내서 현장을 한번 훑어가게 하고 이런 식으로(〈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권 313쪽, 임권택·정성일 대담, 이지은 정리, 현문서가, 2003).”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백산맥〉이 제작되던 1990년대 초 상황이다.

‘반공영화’라는 탈을 쓰고 할 말 하는 감독도

ⓒ연합뉴스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휴전선 너머에 있는 이들이 단순히 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통일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특수 관계에 처해 있는 동포라는 인식이 한국 대중문화계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계기는 좀 엉뚱한 것이었다. 1993년 베스트셀러에 오른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그 계기였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바 있었던 독자적 핵 개발 플랜을 찾아낸 기자가 그 사실을 한국의 대통령에게 알려주고, 한국을 무력 침탈하려는 일본과 그런 일본을 용인하는 미국에 절망한 한국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핵 미사일을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는 줄거리는 어딘가 잔뜩 뒤틀린 민족주의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박정희 대통령의 핵 개발 플랜은 1950년대부터 계속되었던 북한의 핵 개발에 독자적으로 맞서기 위한 계획이었는데, 김진명은 한국인들이 북한보다 더 싫어라 하는 대상인 일본을 끌어들이고는 서로를 의식하며 핵을 개발하던 남과 북이 외부의 적 앞에서 수많은 정치적 계산을 뒤로하고 손을 잡는다는 기괴한 판타지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준 독자들에게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핵 미사일을 완성한 남과 북을 향해 일본의 정치인들이 비굴하게 엎드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답게 도쿄 근처의 무인도를 타격하는 것으로 위력만 보여줄 뿐 인명은 살상하지 않는 폼 나는 장면이 중요했으리라.


기실 1992년 여름에 이미 출간된 바 있는 책이었으나, 이 책이 개작을 거쳐 1993년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대놓고 “김일성 주석”에게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으니 함께 민족의 장래를 이야기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북한을 향해 함께 통일을 논의하자는 이야기는 전임자인 노태우도 취임사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공산국가들조차 거부하고 있는 교리적 이념을 민주의식이 체질화된 이 땅의 자유 시민들이 수용하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며 북한 당국에 충고를 던지던 노태우와 달리 김일성을 ‘주석’이라 칭하며 어디에서라도 좋으니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보자고 제안하는 김영삼의 취임사는 사뭇 달랐다. 민주화 투사 출신의 대통령이 북한과 민족의 미래를 함께 논할 수 있다는 제안을 던지고 민족정기를 복원하기 위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선언한 그해 여름, 이 기괴한 징고이즘(광신적이고 호전적인 애국주의) 소설은 이상한 방식으로나마 북한을 ‘파트너’로 인식하는 대중문화의 새 조류 앞에 서게 되었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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