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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생 김의기와 61년생 황보영국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의로운 청년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대학생 김의기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동자 황보영국 역시 목숨을 바쳐 광주를 부르짖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22일 목요일 제5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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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학생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 놓아 불렀던 26명의 이름 가운데 오늘은 두 명에 대해 얘기할까 한다. 김의기와 황보영국. 1959년생 돼지띠 김의기는 1980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1961년생 소띠 황보영국은 1987년 스물일곱 나이로 비슷한 외침을 지상에 남기고 역사라는 하늘의 별이 됐다. 먼저 경북 영주 출신인 김의기부터 이야기해보자.

1980년 5월27일. 공수부대는 광주 시민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전남도청을 점령했어. 광주는 피로 물들고 군부독재의 통제는 완벽해 보였지. 광주·전남을 제외한 전국 각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정말로 까맣게 몰랐어. 그러나 그 새까만 어둠 속에서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촛불이 오롯이 켜진 건 5월30일, 광주항쟁 종료 후 단 3일 뒤였단다. 서슬이 시퍼렇던 계엄령하의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6층 창밖으로 유인물이 때 아닌 눈처럼 휘날렸다. 근처에 있던 계엄군들이 지체 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 험악한 욕설과 날카로운 구호가 적막한 봄 하늘을 찢었고, 이윽고 한 사람이 6층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과 같은 유인물을 남기고.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5월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당시 희생된 이들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를 직접 보고 돌아온 몇 안 되는 서울의 대학생이었어. 또한 불과 보름 전 계엄 철폐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을 뒤덮었던 수십만 학생 시위대의 일원이기도 했지. 당시 학생운동 리더들은 요구를 충분히 전달했으니 일단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자며 시위대를 해산시켰어(이걸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시위가 절정을 이룬 순간 학생들은 정부에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며 한발 물러섰지만 전두환 일당은 오히려 그 틈을 노렸다. 광주항쟁은 그 와중에 벌어진 비극이었어.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대한민국 국민의 목줄기를 물어뜯은 전두환 일당의 만행에 몸서리를 치며 서울로 돌아왔지만 보름 전에 기세등등했던 수십만 학생 대군은 온데간데없고, 계엄령이 떨어지면 어디어디서 만나 싸워보자는 약속도 이미 시커멓게 잊혀가고 있었어. 김의기는 그 암담함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그즈음 TBC라는 방송사에 근무하던 정훈 PD는 제작비 지급 부서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과 인사를 나누게 돼. “서강대 나오셨다면서요? 제 동생도 거기 지금 다녀요” 하면서 반가워하며 “우리 집엔 형제가 많은데 그 동생이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된답니다”라고 뿌듯해하던 누나였지. 얼마 후 정 PD는 학살자 처단을 외치며 죽어갔던 서강대 후배의 소식과 더불어 그 후배 김의기가 여직원의 동생이었음을 듣게 됐지. 누나의 말에 따르면 김의기는 누구보다 착한 젊은이였어. “의기는 2월에 졸업한다고 했어요. 2월이 돼서도 졸업을 안 하기에 왜냐고 물으니까, 저보다 가난한 친구에게 등록금을 주어서 자기는 가을에 하게 됐다고 하더군요(누나 김주숙의 증언).”

“우째 이럴 수가 있노 세상 사람들아”

그 착하고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게 1980년 5월은 견딜 수 없는 갑갑함이었고 찢어버리고 싶은 재갈이었어. 어떻게 이런 미친 세상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시시덕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인가. 우직한 청년 김의기는 그 괴리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렴. 그의 속내가 그대로 울려 나온다. “이건 아니잖아. 우예 이럴 수가 있노 말이다.”

전두환 정권의 암담함을 알리며 자결한 김의기 열사와 황보영국(아래) 열사.
김의기가 떠난 지 7년이 흘렀다. 그러나 1987년에도 여전히 광주를 이해하는 사람들보다는 전연 깜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어. 최근 100만 관객을 넘긴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보면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감시하던 정보기관 요원이 이런 인터뷰를 한다. 어느 날 노무현 변호사가 그에게 광주항쟁 관련 비디오를 건넸어. “당신도 한번 봐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거 주면 당신 잡아가야 한다’고 뻗대던 정보기관 요원이었지만 호기심이 나서 문 잠그고 비디오를 돌려본 그는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와 치를 떨었다고 해. “백주대낮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노무현 변호사가 활약하던 도시 부산에서도 1987년 4월 광주항쟁 사진전이 열렸어. 당시 사진전 개최에 관여했던 박승원 신부의 말을 들어보자. “시장 아주머니들이 와서 관람 시간을 연장해달라는 거예요. 와서 보고는 광주 영정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정보기관 요원부터 시장 아주머니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진실은 머리를 쇠몽둥이로 두들기는 충격이었던 거야.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성실한 기독교인 청년 황보영국에게도 그랬어. 역시 부산 출신인 박종철 학생 추모 집회에 참석했다가 며칠 유치장에 머문 걸 제외하면 별다른 운동권 활동 이력도 없었던 이 부산 청년은 광주항쟁 7주년을 하루 앞둔 1987년 5월17일, 부산상고 앞 대로에서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사람 모양의 불덩이가 되어서도 그는 안간힘을 쓰고 달리며 외쳤다.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아마 그 역시 생전에 여러 번 경상도 사투리로 한탄했을 거야. “우째 이럴 수가 있노 세상 사람들아.” 끝내 그가 숨을 거두자 경찰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등을 떠밀었다. “빨리 화장해버리시오.” 불타 죽은 그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단 하루 만에 불구덩이로 들어가야 했어. 대학생도 아니고 무슨 노동조합원도 아니었던 황보영국의 죽음은 그때도, 그 이후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어. 그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된 건 무려 14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를 기억했고 역사적인 연설 속에서 황보영국 이름 넉 자를 영원히 살려놓게 돼.

혹여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아빠는 그들이 스스로 몸에 불을 댕기거나 죽음으로 항거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아. ‘열사(烈士)’라는 호칭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 그 호칭이 마냥 달갑지 않은 것은 그들의 ‘죽음’에 방점이 찍힌 표현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야. (아빠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만)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건, 그들의 죽음보다는 그들의 삶 때문이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 살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위 사람들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하려고 했던 그들의 치열한 삶이 우리가 겸손히 올려다보아야 할 역사의 별빛이 되는 이유일 거야. 1980년 5월 이후 7년, 광주라는 이름의 십자가와 수백명 광주 영령의 한 맺힌 가시관을 쓰고서 대한민국은 한발 한발 힘겨운 걸음을 옮겨왔어. 6월항쟁이라는 영광의 언덕을 향해서 말이야. 그 언덕 위에서 문익환 목사는 지나온 길에 핏방울로 떨어졌으나 꽃으로 피어났던 이름들을 불렀다. 목숨 바쳐 광주를 부르짖었던 두 살 차이 경상도 청년, 김의기 학생과 노동자 황보영국은 나란히 서서 그 호명(呼名)을 들었겠지. 경상도 말로 “됐나?” “됐다!” “기분 좋나?” “기분 좋다!”를 주고받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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