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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

1975년 4월 박정희 정권이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여덟 명을 교수형에 처한 후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서울대생 김상진은 준비한 양심선언문을 읽고 자결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13일 화요일 제5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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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역사를 바꿨던 수많은 명연설이 존재하지. 우리 역사에도 많은 명연설이 있었어. 1987년 7월9일 이한열 학생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한 연설도 그중 하나야.

그 연설에는 어떤 미려한 문장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표현도 없었어. 그러나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가 연설을 하자마자 울기 시작했고 끝을 맺고도 한참 동안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흐느꼈지. 연설 내용은 스물여섯 명의 이름이었어. 1970년대 중반부터 1987년에 이르기까지, 유신 시대와 5공화국이라는 야만의 시대, 그 흑암 같은 바위에 맨몸으로 부딪친 ‘열사(烈士)’들을 문익환 목사는 목 놓아 불렀던 거야.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현장을 함께하지 못하였으나 그 순간을 꿈에 그리며 죽어간 사람들, 마침내 국민들이 승리하고 초라한 독재의 찌꺼기들이 굽실거리는 판을 만드는 데 가장 공이 컸던 사람들.

처음으로 불린 사람은 노동자 전태일이었어. 그분에 대한 설명은 여러 번 한 적이 있으니 오늘은 그다음 분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두 번째로 불린 이는 김상진이라는 분이었어.

ⓒ대한매일
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을 사형선고 하루 만에 교수형에 처하자 유가족이 통곡하고 있다.

1975년은 무척 암담한 해였다. 그해 4월9일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여덟 명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단다. 그들에게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건 4월8일, 하루 전날이었어. 즉 사형선고가 떨어진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정권은 그들을 죽여버렸던 거야.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이라는 끔찍한 판결을 듣던 바로 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어느 대학교를 특정하여 ‘긴급조치’를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어. “고려대학교 안에서 집회와 시위를 금하고, 국방부 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병력을 동원하여 이 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라고 선언한 거야. 자그마치 대통령이 일개 대학하고 싸우겠다고 덤빈 셈이야.

그해 봄은 유별나게 황사가 심했다고 해. 유신정권의 살기는 마치 황사처럼 온 대학가와 대한민국을 뒤덮고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목구멍을 틀어막았어. 그러나 그 어떤 잔인한 폭정과 서슬 퍼런 권력의 독기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던 것이 우리 현대사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지. 긴급조치 발표 사흘 뒤, 그리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창졸간에 목숨을 빼앗긴 이틀 뒤 이 독살스럽고도 유치했던 독재정권에 대한 대거리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터져 나왔어. 그 주인공이 바로 서울대학교 68학번 김상진이었지.

그는 학생회 활동을 하긴 했지만 이미 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이었어. 서울대학교 간판 들고 좋은 곳에 취직을 하든, 대학원에 가서 학문을 하든 그 앞길이 그렇게 어두울 리 없는 유망한 청년이었다는 뜻이야. 실제 김상진은 졸업반으로서 자신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고 해. 하지만 세상이 험악하게 변하고 후배들도 기가 질린 듯 움츠러들자 그 마음이 바뀌었던 것 같아. “복학하고 보니 조직이 개판이다. 바로잡아야겠다(<70년대 캠퍼스> 신동호, 도요새출판사).”

“사람이 죽었는데 감옥 가는 게 대수냐”

축산학과 대책위원장 노릇을 스스로 떠맡은 김상진은 4월11일 서울농대 3차 집회를 준비하게 돼. 그런데 좀 이상했어. 양심선언문을 써서 각 방송국에 보낸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기자들에게 기이한 귀띔을 한 거야. “서울농대에서 4월11일에 뭔가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4월11일 김상진은 선후배와 친구들 앞에 우뚝 서서 준비한 양심선언문을 피 끓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전략)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 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러운 삶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을 고발한 고 김상진 열사.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김상진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을 거야. 이윽고 그가 할 일의 예고와 같은 한마디였기 때문이야. 친구들도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에 사로잡혀 김상진을 바라보았겠지.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그 후 김상진은 원고에서 눈을 떼고 사람들을 바라보며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해.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명실상부하게….” 김상진을 주시하던 친구들의 눈이 커지고 비명이 튀어나왔어. 김상진이 품 안에서 칼을 꺼냈던 거야. 후배와 함께 시내에 나갔을 때 ‘아이스크림을 사오너라’ 하면서 후배를 따돌리고 샀던 날선 과도였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곁에 있던 친구들이 구르다시피 김상진을 덮쳤지만 그는 이미 힘껏 자신의 아랫배에 과도를 꽂고 그어 올리고 있었어. 자신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음박질치는 친구들에게 김상진은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고 해. 동해물과 백두산은 어찌어찌 나왔지만 눈물은 결코 마르지 않았고 심장은 닳아 없어지고 있었겠지. 통곡 반 노래 반의 애국가를 들으며 김상진은 생애 마지막 하늘을 눈에 담으며 의식을 잃어갔단다. 김상진이 스물다섯의 짧은 생을 끝맺었을 때 박정희 정권은 정상적인 장례조차 허용하지 않았어. 사망한 지 하루도 안 돼서 반강제로 시신을 화장터로 옮겨 화장을 해버렸던 거야.


그해 4월은 정말로 잔인했어. 인혁당 사건, 김상진 사건 등으로 전국이 얼어붙었고 하필이면 4월30일에는 ‘자유 우방’으로 한국군이 파견되기도 했던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공격에 무너졌단다.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공포가 전국을 휩쓴 가운데 유신정권은 5월13일 긴급조치의 집대성이라 할 긴급조치 9호를 내려 온 나라를 질식시켰어. 유신헌법을 ‘비방’만 해도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극악한 조치였지. 아마 청와대에서는 축배를 들었을 거야. “각하, 이제는 조용할 것입니다.”

긴급조치 9호가 살기 어린 칼춤을 추기 시작한 지 고작 9일째인 5월22일, 서울대학교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터져. ‘오둘둘 시위’라고 불리는 이 시위는 이제는 별수 없겠지 가슴을 펴던 박정희 정권의 턱에 작렬한 스트레이트였지. “정의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이 시위를 준비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작은 논쟁이 있었다고 해. “살인적인 긴급조치가 내려진 마당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과 “김상진 형이 그렇게 죽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감옥 가는 게 대수냐”는 주장이 맞선 거지. 당연하게도 후자가 이겼고 오둘둘 시위 속에서 김상진의 이름은 처음으로 역사 속에서 불려진다. “아, 아, 맨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리라/ 너는 순진한 피 한 방울로 오려마/ 서러운 이야기를 뒤에다 두고/ 그때는 너의 알몸으로 오려마(서울대 영문과 4학년 김정환의 조시 중).” 아마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며 김상진은 못다 읽은 그 양심선언문의 마지막을 읊으며 함께 달렸을 거야.

“만족스러운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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