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3일 오후 10시(현지 시각)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에 60일간 계엄령이 내려졌다. 필리핀 역사상 36년 만에 다시 선포된 계엄령이다. 민다나오 마라위 시 상공에는 헬기가 떴고 장갑차를 앞세운 특수부대 등 계엄군이 투입되었다.

ⓒEPA5월23일 계엄령이 내려진 민다나오 마라위 시에서 무장군인들이 행진하고 있다.

수도 마닐라에서 700㎞가량 떨어진 민다나오 섬은 크기가 필리핀 국토의 약 3분의 1에 달한다. 인구는 약 2200만명이 거주한다. 민다나오 섬은 원래 필리핀 이슬람교도들이 살던 곳이었다. 지금도 가톨릭교도(63%) 다음으로 이슬람교도(32%)가 많이 거주한다. 정부군이 군사작전을 벌이며 소탕하려는 대상은 이슬람국가(IS) 추종 세력인 마우테 반군 무장조직이다.


지난 5월23일 필리핀군은 마우테 조직의 지도자 이스닐론 하필론의 은신처를 급습했다. 하필론은 2개월 전 정부군의 공습으로 부상당한 후 숨어 지냈다. 그러자 위험에 빠진 하필론을 구하기 위해 마우테 무장대원 100여 명이 마라위 시로 출동했다. 반군들은 마라위 시청, 병원, 교도소 등 주요 시설을 점거했다. 이들은 또 곳곳에 불을 지르며 하필론 구하기에 나섰다. 반군들은 현지 경찰서장을 참수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100여 명도 풀어주었다. 정부군은 하필론 체포에 실패했다.

하필론은 ‘필리핀의 아미르(이슬람권에서 왕이라는 뜻)’로 불린다. 2014년 공개적으로 IS에 충성을 맹세하기도 한 하필론은 IS의 동남아 지역 총책임자로 미국 법무부가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그는 필리핀 내 이슬람 분리주의 단체 중 가장 과격한 ‘아부 사야프’의 지부인 마우테 조직을 이끌고 있다. IS 추종 세력인 이들은 필리핀 남부 섬 지역을 분리·독립시켜 이슬람국가(칼리프 제국)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AFP PHOTO5월31일 민다나오 섬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주민들이 피란길에 올랐다. 사진은 피란 가는 엄마 품에 안겨 있는 한 아이의 모습.

마우테 조직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알카에다와 연계를 맺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다바오 시 성당 폭탄 테러, 1994년 바실란 섬 버스 납치 사건, 2001년 팔라완 섬 관광객 납치, 2004년 마닐라 여객선 폭탄 테러 등이 이들이 저지른 사건이다. 지난 2월 독일인 관광객을 납치하고 참수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 같은 테러를 지하드(성전)라고 포장하지만, 돈벌이를 위한 ‘납치 비즈니스’ 성격도 강하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마라위 시는 혼돈에 빠졌다.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주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마라위에서 목공소를 운영하는 제레모 씨(40)는 집 근처에서 총소리를 듣고 피란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피란 가는 차들이 너무 많아 도로가 꽉 막혔다. 아내와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하얀 천으로 깃발을 만들어 달고 무조건 마라위 시를 벗어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가톨릭 신자라 이슬람교도인 마우테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고 또 정부군 공습에 죽을지도 모르는 신세다”라고 말했다. 현재 마라위 시 인구 20만명 중 90%가 다른 지역으로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우테 조직은 가톨릭 신부와 신자, 또 피란 가지 못한 주민을 인질로 삼아 정부군의 공격에 맞섰다. 필자는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여러 차례 SNS로 접촉을 시도했지만 필리핀 정부가 SNS를 통제하고 있어서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탈출한 또 다른 주민을 통해 “마라위 시가 마우테 반군에게 장악되자 남아 있는 주민들은 문을 잠그고 가구로 입구를 막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는 증언을 들었다. 5월31일에는 지상에 투입된 병사 11명이 정부군의 오폭으로 숨졌다. 6월2일 현재 이번 사태로 반군 120여 명, 정부군과 경찰 30여 명,  민간인 19명 등이 숨졌다.

계엄령 선포 당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 중이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신형 무기 공급을 요청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러시아가 현대적 무기를 제공해주길 바란다. 나는 러시아의 지원을 얻고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연히 군사기술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하다”라고 응답했다. 필리핀은 당초 테러와의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미국이 지원해주기를 원했다. 지난해 두테르테가 벌인 ‘마약과의 전쟁’에서 무려 4000여 명이 생명을 잃자 미국 의회는 인권유린이 심각하다며 필리핀에 무기 공급을 반대했다. 미국 국무부가 필리핀 경찰에 소총 2만6000정을 공급하려던 계획을 보류했다.

인권운동가들이 계엄령 반대하는 이유

필리핀에는 ‘계엄령 악몽’이 있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년간 장기 집권한 바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공공연히 마르코스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해왔다. 일각에서는 이번 계엄령을 두테르테 대통령의 계산된 행보로 해석하기도 한다. 1987년 개정된 필리핀 헌법은 반란 등으로 국가의 안전이 위기에 처한 경우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간은 60일로 제한된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식의 장기 계엄령을 막기 위해서다. 또 의회에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대한 견제장치를 두었다. 의회가 다수결로 계엄령을 해제하거나 연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재 필리핀 상원의원 23명 가운데 15명이 두테르테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상원은 물론 하원의원의 90% 이상이 친두테르테 진영으로 분류된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부 지역에도 IS 추종 단체들이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테러 활동이 진정되지 않으면 나라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일(테러와의 전쟁)을 하는 데 1년이 걸리면 그만큼 계속할 것이다”라고 밝혀 계엄령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과 상하원 의석 분포를 따져보면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그가 마르코스처럼 장기 집권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AFP PHOTO5월23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왼쪽).

이를 우려한 일부 시민과 인권운동가들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한다. 필리핀의 민주주의 영웅인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도 계엄령을 확대할 수 있다고 발언한 두테르테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5월29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시민 1000여 명이 모여 민다나오 섬에 대한 계엄령 반대 집회를 열었다. 


한편 한국 외교부는 민다나오 지역에는 ‘흑색경보(여행금지)’에 해당하는 특별여행경보를 발령했다. 카가얀데오로 시, 다바오 시에도 ‘적색경보(철수 권고)’에 준하는 특별여행주의보를 내렸다. 특별여행주의보가 내려지면 여행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긴급 용무가 아닌 한 철수할 것을 권고한다는 의미이다. 필리핀 주요 휴양지인 보라카이·보홀 섬, 세부막탄 섬, 수빅 시는 ‘여행유의(1단계)’, 이들 지역을 제외한 필리핀 전역은 ‘여행자제(2단계)’가 내려졌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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