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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육볶음의 ‘제육’ 어디에서 왔을까

고영 (음식문헌 연구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15일 목요일 제5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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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둥글한 구석이 없다. 살집이 느껴지지 않는다. 삼각형을 이룬 대가리와 눈빛이 날카롭다. 엉덩이께는 기운이 생동한다. 사람에게 잡혀 요리된다면 족발로 오를 돼지다리와 발굽마저 어느 한구석 뭉텅이진 데 없이 날렵하다. 지면을 막 박찬 듯한 굽이 엄니처럼 예각을 그린다. 그림을 남긴 김준근은 훈민정음으로 ‘산제’라고 썼다. 곧 멧돼지다. 한글로는 멧돗, 산돗으로 쓰고 한자로는 야저(野猪), 산저(山猪) 또는 생저(生猪)라 쓴다. 지금 제육볶음에 쓰이는 ‘제육’은 저육이 변형된 것이다.

조선 말기 화가 김준근의 그림 ‘산제’.
멧돼지는 집돼지와 나란히 즐겨 먹던 식료였다. 서민도, 왕실도, 임금에게 식료를 선물받는 고위 관리도 멧돼지를 먹었다. 조선 최대의 산업백과사전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동물로 소, 돼지(집돼지), 개, 양, 멧돼지, 곰, 산양, 사슴, 고라니, 노루, 토끼를 나란히 제시했다. 이에 앞서 18세기에 편찬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12월의 제철 식료로 멧돼지를 꼽았다.

전통 사회에서는 돼지를 길러 잡을지 사냥 나가 잡을지 갈등이 깊었다. 축산의 조건이 오늘날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농사짓다 나온 부산물, 밥 먹고 남은 찌꺼기 외에 어떤 사료도 없던 시절이다.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작물과 그 부산물을 원료로 큰 공장에서 만든 사료를 구입해 가축을 치는 축산은, 적어도 1960년대 이후에나 본격화되었다. 집돼지에게는 부엌에서 나온 구정물쯤이 돌아갔다. 도토리, 칡 또는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 등은 사람과 돼지가 나누어 먹어야 할 먹을거리였다. 지금은 당연히 가축에게 돌아가는 밀기울도, 과거에는 사람의 식량이었다. 그러니 일반 농가에서는 돼지 서너 마리 치면 그만이었다. 더 많으면 먹일 게 없어서 돼지치기가 버거워졌다. 농가보다 구정물이며 개숫물이라도 많이 나오는 큰 고을의 객주와 여각은 돼지를 칠 형편이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객주와 여각은 한 끼라도 먹고 떠나는 손님으로 늘 붐비는 공간이었으니까.

기르기보다 잡는 쪽을 선택해도 셈을 다시 해야 한다. 종일 산과 들을 쫓아다니는 동안 농사는 누가 짓는가. 종일 쫓아다닌다고 반드시 한 마리 잡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러니 잡는다 해도 농한기에 나서야 한다. 농한기는 대개 막 겨울에 접어들며 시작한다. 그때에야 사냥 실패를 무릅쓰고 다닐 만하다. 그렇게 해서 겨울에 사냥한 멧돼지가 김준근의 또 다른 그림에 나오는 ‘동저(冬猪)’이다. 이를 사 모아 중개하는 상인이 바로 ‘동저상’이다.

100년 전만 해도 귀하디 귀했던 돼지고기


조선 말기 화가 김준근의 그림 ‘동저상’.
그런데 이 그림 속 자빠진 멧돼지에는 맹수다운 분위기가 없다. 날카로운 이빨도, 못잖은 발굽도, 철사처럼 빳빳하게 세운 털도 보이지 않는다. 애처롭게 뒤집혀 누운 저놈들은 새끼임에 틀림없다. 겨울 사냥에 나선 사냥꾼은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창 든 몰이꾼 두셋에, 화승에 점화하고 터지기까지 4초쯤 걸리는 화승총을 든 포수 한둘이 나서는 사냥이다. 이들에게 다 자란 수놈이나 어미는 상대하기에 너무 위험한, 너무 버거운 맹수다. 고기도 질기게 마련이다. 차라리 성체를 따돌리고 새끼를 줍는 편이 낫다.

돼지고기 한 점 먹기가 이렇게 어려웠다. 사료로 전환 가능한 곡물이 전 지구를 돌고, 사료용 작물이 육종된 데다가 따로 재배되고, 옥수수기름이며 콩기름을 짜낸 찌꺼기가 넘치고, 그것마저 가공해 팔겠다는 산업과 축산업이 손잡으면서 돼지고기는 우리 앞에 드디어 흔전만전이 되었다. 겨우 10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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