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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영화로운’ 삶

한국 최초 국제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만들고 지난 21년간 BIFF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 한국에서 가장 오랜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씨의 생애를 돌아봤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7년 06월 15일 목요일 제5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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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볼에 여드름 자국 선명한 앳된 청년이 조문객을 맞았다. 조문을 마친 이가 울먹이는 얼굴로 덥석 그를 품에 안았다. 청년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안겨 있다 풀려났다. 청년의 곁을 지키던 이는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BIFF) 전 집행위원장. 그가 청년에게 나지막이 아버지와 조문객의 관계를 설명해주었다.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5월27일부터 사흘간 부산국제영화제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 있었던 단 한 명의 상주 김이진, 1997년생. BIFF 출범 이듬해 태어났다. 학창 시절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쓰라는 질문을 만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아버지 이름을 썼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다. 아홉 살 때부터 꿈은 ‘BIFF 프로그래머’였다. 아버지의 직업이기도 했다. 1년이면 절반을 집 밖에서 보내는 아버지가 신기하게도 밉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의 시간은 아버지와 영화를 봤다. 100편도 넘는 영화를 함께 보면서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때로는 수면제로, 때로는 밥처럼 먹고 자랐다. 물론 아버지가 보여주는 영화가 아무리 좋아도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만큼 좋은 건 없었다.


그늘진 얼굴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잠깐씩 밝아지곤 했다. 실은 장래희망이 바뀌었다고 그가 말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아버지가 좋아도 아버지처럼 살고 싶은 아들이 있으려고.’ 다시 물었다. “뭘로 바뀌었어요?” “영화 프로듀서요.” 프로듀서 역시 빛나는 주인공의 자리는 아니다. 다만 한 편의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꼭 필요한 ‘곁’이다. 아버지의 삶이 그러했듯이.

이진씨의 아버지 고 김지석, 1960년생. 한국 최초 국제영화제인 BIFF를 만든 멤버 중 막내. BIFF의 수석프로그래머이자 부집행위원장으로, 지난 21년간 자의로든 타의로든 BIFF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오랜 영화제 프로그래머 경력을 가진 이. “추모 영상을 만들고 있는데 선생님이 사진 중간에 있는 사진이 거의 없어요.” 김정윤 BIFF 홍보실장의 말이다. 김지석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걸어다니는 BIFF의 역사였고 증인이었다.

ⓒ시사IN 조남진
2015년 12월10일 <시사IN>과 인터뷰할 당시 찍은 사진. 김지석 BIFF 수석프로그래머가 BIFF 20년의 역사이기도 한 영화제 포스터가 전시된 사무국 앞을 걸어가고 있다.

지난 5월18일 김지석은 프랑스 칸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향년 57세. 영화제 참석을 위해 칸에 도착했던 5월16일부터 조짐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휴식을 권했다. 2016년 3주간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고혈압과 고지혈, 그리고 약간의 당뇨 증세를 진단받았다. 그런 병의 목록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김지석에게 1996년은 특별한 해다. 그해 결혼했고, 아들이 생겼고, 수년간 공들인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를 출범시켰다. 영화제를 만들긴 했는데 당장 사무국을 운영할 돈 한 푼 나올 구멍이 안 보이던 때였다. 수영만 요트경기장 본부 건물 2층 쪽방에 책상 3개를 놓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결혼자금으로 모아뒀던 500만원을 선뜻 내놓은 덕분이었다. 김지석의 ‘40년 지기’이자 그의 “사악한 꼬임”에 넘어가 훗날 BIFF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 된 오석근은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을 한 번도 돌려달라고 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사제 영화 교과서’를 만들다

남포동 극장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김지석은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돌며 일본 잡지 <스크린>을 사 모으던 소년이었다. ‘영화광’으로 이름을 날리던 배정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의 소개로 동인고등학교에도 있다는 또 한 명의 영화광 오석근을 만나 영화 지식을 겨루다 평생 친구가 되었다. 부산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공은 뒷전이었다. 시대가 그랬다. 부마항쟁의 열기와 여파가 불러온 엄혹한 분위기는 학교 밖을 배회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경성대로 진학한 오석근과 함께 극장과 프랑스문화원으로 등교했다.

그가 영화 보는 일만큼이나 정성을 쏟은 곳은 동아리 ‘영화연구회’였다. 주성철 <씨네21> 편집장의 회고다. “한참 아래 대학 영화동아리 후배였던 나는 그에 대한 여러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바로 그가 만든 ‘사제 영화 교과서’였다. 변변한 영화개론서 하나 없고 개인용 컴퓨터도 보기 힘들었던 1980년대. 몽타주니 미장센이니 하는 영화 용어와 개념들을 손으로 직접 써서 정리한 프린트물을 제작해 영화 수업 교재로 썼다(<씨네21> 제1107호 중).”

그런 대학 시절을 보내고도 영화를 업으로 삼는 일은 엄두를 못 냈던 걸까. 동파이프를 만드는 부산 굴지의 회사에 최종 면접을 앞둔 ‘취업준비생’이던 어느 날, 김지석은 훌쩍 강원도 양구로 향했다. 군에 입대한 오석근의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그에게 탕수육을 사 먹이고 부산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면접 시간에 늦은 때였다. 어쩌면 그는 이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양구로 향했는지도 모른다.

ⓒ연합뉴스
1996년 9월13일 국내 최초의 국제영화제가 부산에서 열렸다.

1985년 경성대에 부산 최초로 연극영화과가 생겼다. 후에 BIFF 창립 멤버가 되는 이용관과 전양준이라는 젊은 교수들이 부산을 오가게 되었다. 이용관은 프랑스문화원에 들렀다가 김지석과 오석근을 만난다. 두 사람은 이미 ‘씨네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나름의 영화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네 사람의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술·담배를 전혀 못하는 김지석에게는 고역스러웠으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번 시작된 술자리는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런 시간이 모여 1989년 영화잡지 <영화 언어> 창간으로 이어졌다. <영화 언어>는 1995년까지 발간됐다. 잡지 발간 비용은 당시 유일한 ‘정규직’ 교수였던 이용관이 댔다. 그사이 김지석은 이용관의 권유에 따라 중앙대학교 영화과에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비를 들여 해외 영화제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국·홍콩· 서유럽 영화 이외 국가의 영화는 거의 보기 힘들었던 당시 국내 영화계의 문화적 환경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991년 일본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김지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다양한 국가의 영화가 한자리에서 상영되고, 수많은 해외 영화인이 교류하고 있었다.

김지석의 마음에 불을 지른 영화제는 따로 있었다. 1992년 여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작지만 권위 있는’ 페사로 영화제가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었다. 한국영화특별전 책자의 필자로 참여한 평론가들이 초청되었고, 김지석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김지석은 세미나를 할 때나 모임이 있을 때면 “우리도 국제영화제를 할 수 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반응은 미지근했다. 오석근의 말이다. “야 이 미친놈아, 그게 가능하냐.” 이용관은 대답 대신 술잔을 건넸다. 김지석은 못 마시는 술잔을 받아 삼키고는 기절했다.

김동호 BIFF 이사장은 “1995년 8월18일 오전 10시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그날 김동호는 서울 프라자호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문화부 차관, 영화진흥공사 사장까지 역임했던 그에게 ‘일천한 경력’의 30대들이 찾아와 국제영화제를 열고 싶은데 집행위원장으로 와달라고 했다. 이용관과 전양준 그리고 김지석이었다. 국내에서 국제영화제를 만들려는 시도가 그동안 없었던 게 아니었다. 김동호에게 도움을 구한 이들도 이미 여럿이었다. 그러나 이들처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프라자 회동’이 성사됐다.

한국 최초 영화 제작사인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됐던 도시, 한국 최초의 영화평론 모임이 결성됐던 도시, 부산에 다시 한번 영화의 바람이 불었다. ‘비경쟁’과 ‘아시아’를 화두로, 국가가 아닌 민간이 주도하고 기획한 국제영화제. ‘그런 거’는 서울에서나 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를 비웃듯 5만명을 예상했던 제1회 BIFF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18만 관객을 모았다.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극장에서 쥐가 나오고, 갑자기 자막이 안 나오고, 통역이 없어 관객이 통역사로 나서고….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실수가 거듭되는 와중에 김지석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몸무게는 10㎏ 가까이 줄었다. 영화제 마지막 날, 영화 동아리를 함께했던 친구의 말 한마디가 김지석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소원 성취했네요.”

주먹구구였던 영화제 시스템은 2000년 제5회 BIFF를 기점으로 안정화됐다. BIFF는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집행위원장이 찾는 영화제로 발돋움했고, 2014년에는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로 부산이 선정되는 데 기여했다. BIFF는 한국 영화를 해외로 진출시키는 가장 중요한 창구였고, 그간 세계시장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아시아 영화의 허브였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지아장커, 모흐센 마흐말바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지금은 누구나 안다고 말하는 그 거장들이 거장이 되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 세계 영화의 지도에 자리를 잡아주고 한국에 그들을 알렸다.” 남동철 프로그래머의 회고다. 영화제 개막식에서 김지석은 늘 게스트를 호명하는 일을 맡았다. 아시아 영화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김지석밖에 없었다.

ⓒ시사IN 신선영
5월29일 부산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김지석 BIFF 수석프로그래머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국내외 조문객들이 추모 영상을 보고 있다.

김지석은 영화제 기간이면 ‘BIFF의 친구들’을 위해 하루 10끼 이상을 먹었다. 그 덕분에 해외 게스트들은 이제 알아서 부산의 ‘맛집’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가 해외 영화인들을 초청하며 이메일에 쓴 단골 문구는 “맛있는 갈비와 삼계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였다. 맛집들은 모두 아들 이진씨와 먼저 먹어보고 

검증한 곳이기도 했다. 언론들은 BIFF 기간이면 부산 내 먹을거리를 소개하는 기사를 내곤 하는데, 2010년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더 많은 맛집을 알고 싶다면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을 찾아보면 된다(<이데일리> 2010년 10월5일).” 올해 아시아영화아카데미 교장을 맡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교장직을 수락하며 내건 조건이 “김지석이 6월에 도쿄를 방문할 때 ‘해운대의 간장게장’을 사다줄 것”일 정도였다. 이제 그 약속은 영영 지킬 수 없게 됐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던 ‘김지석 키즈’들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우리 다음에 만나면 김쌤 기억하면서 맛있는 거 먹자.” “근데 김쌤이 소개했던 집 다 맛있는 건 아니었는데(웃음).”

BIFF 이후 생긴 영화제들은 모두 BIFF에 빚을 졌다. 김지석은 BIFF가 국내 영화제의 표준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국내 영화제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아시아프로젝트마켓·아시아영화아카데미· 아시아영화펀드 등, BIFF가 커나가는 동안 김지석의 머리와 손발을 통해 기획되고 실행된 프로젝트들은 사람을 키워내는 동시에 부산이라는 도시에 무형의 가치를 더했다.

BIFF는 ‘정부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문화예술계의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 그 어떤 영화제보다 잘 지켜지는 모범적인 영화제이기도 했다. BIFF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건 이 원칙이 무너지면서 부터였다. 2014년 세월호 구조 실패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상영한 BIFF는 홍역을 치렀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공식 초청된 작품의 상영을 중단하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 BIFF는 늘 그러했듯 의연하게 버텼다. 정부 지원은 축소됐고, 집행위원장 이용관과 부집행위원장 전양준은 부산시와 감사원의 거듭된 감사 끝에 법정에 섰다.

달맞이고개 영화관에 계실 거죠?

김지석은 BIFF 20주년의 기록을 정리한 책 <영화의 바다 속으로>(본북스)를 싸들고 부산시 공무원들을 찾아다녔다. 자식뻘의 공무원에게도 예외 없이 두 손 공손히 모아 “제발 한 번만 읽어달라”며 책을 건넸다. 해법을 놓고 영화제 안팎의 타협파와 강경파의 갈등과 반목이 거듭되는 와중에 영화단체들의 BIFF 보이콧이 이어졌다. 2015년 김지석은 BIFF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 불참했다. 모두가 김지석도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다. 아예 BIFF를 중단하자는 강경파의 주장이 우세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지석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대로 남아 영화제를 지키고 수습하는 쪽을 택했다. 해외 영화제가 그에게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지만 거절했다.

ⓒ본북스 제공
1992년 여름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석·전양준·박광수(왼쪽부터).

그러나 부집행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지석을 향한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2016년, 제21회 BIFF는 그가 ‘왕년의 동지들’ 없이 외롭게 치른 첫 영화제였다. 그는 새 직함이 적힌 명함을 장만하지 않는 것으로 그 책임을 지려 했다. “오르고 싶어서 오른 자리도 아니고, 수석프로그래머면 족합니다(2017년 5월19일 <노컷뉴스> 추모 기사 중).” 당시 그의 SNS는 다짐으로 빼곡했다. “비프힐 옥상의 연출팀 주조정석. 나는 늘 이 자리를 지켜왔다(2016년 10월6일).” 현장판매분 티켓을 구하기 위해 우산을 쓰고 줄 서 있는 관객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들의 행복을 누군가가 빼앗아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2016년 10월8일).”


김지석은 아시아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보았다. “비민주적인 정권에 의해 저질러지는 야만적인 통치 행위가 예술가들의 영혼에 어떻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목격”했다. 이는 ‘민주화된 줄 믿었던’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던 3월10일 김지석은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전양준 부집행위원장의 2심 재판에서 무죄선고만 받으면 내 한(恨)은 다 풀릴 듯.” 5월9일 대통령 선거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밤 10시19분, 그는 생일을 축하하는 지인의 댓글에 “최고의 선물”이라는 답을 달았다. 이날 그는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한테 받은 문화 포장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BIFF 정상화라는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오는 10월12~21일 제22회 BIFF는 처음으로 김지석 없이 열린다. 김지석은 60세까지 BIFF 수석프로그래머로 후배들을 돕다가 ‘독립’하는 꿈을 꾸었다. 달맞이고개에 365일 영화제를 열 수 있는 소규모 컨테이너 극장을 열고 싶어했다.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에게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이 올라간 뒤 바다가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날’에 대한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정 대표는 2020년까지 김지석이 꿈꾸었던 영화관을 대신 만들 예정이다. “그동안 형이 발굴했던 영화만 틀어도 2년은 거뜬히 굴릴 수 있겠더라고요.” 김지석은 그렇게 부산 앞바다에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반드시 책임지십시오”


지난 5월19일 새벽 3시, 이용관 전 부산국제영화제(BIFF) 집행위원장은 칸으로부터 온 전화에 잠이 달아났다. 김지석 BIFF 수석프로그래머 겸 부집행위원장의 사망 소식이었다. 그날 오후 이 전 집행위원장의 횡령죄에 대한 2심 마지막 공판이 열렸다. 이 전 집행위원장의 1심 결과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유죄였다. 2심은 6월23일 선고 예정이다.

일련의 과정이 <다이빙벨> 상영으로 인한 ‘정치 보복’이라는 의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근혜 게이트 수사와 기자들의 취재로 밝혀졌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2014년 9월11일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부산 위원장(이용관). 이념 편향적 人物(인물). 중립적 공정 임무 수행에 애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다. 2015년 영화진흥위원회 예산 심사 회의에서 BIFF 지원 예산 삭감 안건이 통과됐다. 이후 감사원의 감사와 고발이 이어졌고, 이 전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전·현직 BIFF 관계자 4명이 업무상 횡령·사기 등의 혐의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연합뉴스
1월10일 BIFF를 지키는 시민문화연대가 부산시청 앞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쑥대밭이 된 BIFF는 가까스로 외압을 버텨내고 있었다. 반토막 난 예산으로도 내실 있게 치러진 영화제의 공을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에게 돌리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BIFF 관계자는 “돈이 부족했지만 김지석 인맥으로 가까스로 수급된 영화가 많다. 해외 영화인들의 BIFF 지지 발언을 끌어낸 것도 그의 공이 컸다.” 아시아 국가별로 핵심 영화인을 모두 친구로 만들어둔 그의 인적 네트워크가 빛을 발했다는 평이다.


지난 1월 박영수 특검 수사로 김종덕·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BIFF 사태에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산시에 <다이빙벨>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한편 상영관의 전 좌석 매입을 지시해 관람을 방해했다는 내용이었다. 강수연 BIFF 집행위원장은 1월19일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리스트의 전모가 부산국제영화제 사건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났다”라고 유감을 표명했다.

BIFF 정상화의 공은 이제 새 정부로 넘어갔다. 김 수석프로그래머의 40년 지기인 오석근 감독은 5월29일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읊으며 객석의 서병수 부산시장을 바라봤다. “BIFF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라는 대목을 읽으면서였다. BIFF에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표현의 자유’이며, BIFF의 정상화는 사태의 책임을 정확히 묻는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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