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심리 전문가가 되기 위해 대형 병원에 들어갔다. 수련을 마치면 전문직으로 살 수 있었다. 안정된 미래도 보장될 터였다. 하지만 들어가 보니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군기 잡는’ 조직 문화에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상담자로서 내담자인 자신을 상담했다면 퇴사하라고 말할 것 같았다. 스물일곱의 봄, 석 달 만에 병원을 뛰쳐나왔다.

백수의 낮은 길었다. 요즘은 대기업 퇴사하는 사람도 많다던데 뭐 하고 사는지, 어떤 마음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서점에 갔더니 퇴사하고 성공한 얘기밖에 없었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 막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검색도 잘 되지 않았다. 직접 그려보기로 했다. 늦었지만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2015년 5월, ‘집에서 굴러다니는’ 아이패드로 그림일기를 그려 블로그(blog.naver.com/leeojsh)에 올리기 시작했다. 점차 보는 사람이 많아져 페이스북 페이지 ‘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facebook.com/leeojsh)’도 열었다. 웹툰 작가 서늘한여름밤(29·이하 서밤) 얘기다. 본명보다 필명을 더 선호하는 그녀는 현재 심리상담센터 에브리마인드에서 일하며 짬짬이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린다. 팟캐스트 ‘서늘한 마음썰’도 진행한다.

ⓒ시사IN 조남진

서밤의 그림일기에는 화려한 그림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희고 동그란 몸통의 주인공 서밤이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게시물마다 수백 회에서 수천 회 공유된다.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 수는 8만6000여 개에 달한다. 나 혼자 뒤처져 있을까 봐 두려워하고, ‘빛나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견디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애인에게 자신감을 떠먹여 달라고 고백하는 그림일기 속 서밤을 보다 보면 모니터 앞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기분이 든다. 20대 여성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공감한다’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소소한 일상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성 소수자 혐오 반대, 강남역 살인 사건 등 사회 이슈에도 목소리를 낸다.


서밤은 그림으로 ‘나답게 살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고 했다. “사회는 늘 ‘너답게 살라’고 해요. 그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쉽게 잃어가요. ‘힘든 일이고, 때로는 타인들과 갈등할 수도 있고 엄청나게 외로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여기서 한번 나답게 살아볼게.’ 그런 얘길 하고 싶어요.”

특히 많은 공감을 얻은 에피소드 50편을 엮은 책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예담)가 최근 나왔다. 어떤 독자가 읽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서밤은 “편집자가 이 책을 만들고 퇴사했다”라며 웃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망설여지는 순간 있잖아요. 그게 뭐든. 그럴 때 읽으면 용기가 되지 않을까요. 변화의 기로에 있거나 이제 막 그 변화에 뛰어들어서 혼란스러운 분들이 읽고 마음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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