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은호원은 5년 동안 100번이나 ‘자소설’을 쓰고도 번번이 입사에 실패한 ‘흙수저’다. 우여곡절 끝에 하우라인이라는 가구 회사에 3개월 인턴으로 입사한다.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작 3개월짜리 인턴이며 여성인 은호원에게 쉽게 기회가 올 리 없다. 그녀는 그런 현실에 마냥 순응하지 않는다. ‘가족 같은 회사’를 강조하지만, 사실은 위선과 비굴로 짜인 불합리한 회사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은폭탄’이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회사가 진행하는 공모전이 취업 준비생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자 “이건 취업 사기입니다! 6만 취준생을 우롱하는 일입니다”라며 시정을 요구한다. 사내 정치, 거래처 접대 등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라고 여겨지는 상황에도 “그건 아닌 것 같다”라며 단호하게 맞선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소신껏 행동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인물 역시 언제나 은호원이다. 그런 은호원의 소신과 최선은 자신뿐 아니라 인턴 3인방을 비롯한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은호원이 성장하면 어떤 여성이 될까? 주말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의 변혜영이 된다면 어떨까? 변혜영은 부모에게 남자친구와 동거한 사실을 들키고 난 뒤, 결혼이 여성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인지 설명하며 변화된 가치관을 대변한다. 부당한 상황에서는 ‘역지사지(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 안다)’ 정신을 몸소 실천한다. 이런 여성들을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은호원과 변혜영의 미래는 ‘누구’일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우리는 ‘유리천장을 깬’ 여성들을 만나고 있다. “나의 적은 북쪽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남군과 문서 쪼가리들이었다”라며 부당한 남성 사회와 끊임없이 싸워온 피우진 보훈처장, 국제무대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등의 이름 앞에 모두 ‘여성 최초’와 ‘파격’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제야 그 존재를 알았다는 듯 호들갑스럽게 등장한 ‘유리천장’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견고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유리천장이 깨졌다”고 하지만 여성들 대부분은 ‘높은 유리천장’에 이르기도 전에 바로 머리 위 ‘낮은 강철 천장’에 존재를 욱여넣으며 버틴다.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출산 전날까지 이를 악물고 야근하다가 애 낳고 2주 만에 출근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승진에서 소외되는 만년 과장 조석경처럼 말이다. ‘워킹맘’에 ‘이혼녀’라는 꼬리표는 조 과장의 경력과 능력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이상해〉의 이미도 과장 역시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지만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회사에서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유리천장은 저항 없이 깨지지 않는다 과연 ‘일부’ 여성들이 깬 유리천장이 다른 여성들에게,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여성들의 성공 서사에 주목하여 안도하기보다 학력과 성별 등을 이유로 ‘강철 천장’에 갇혀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은호원과 변혜영처럼 현실을 제대로 자각하고 응시하며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존재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 유리천장은 무저항과 무중력 상태에서 저절로 깨지지 않는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여성들이 이제야 발굴되는 남루한 현실, 여전히 ‘유리천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구조의 문제를 외면하는 빈곤한 사회의 민낯을 자각할 때다. 이제 겨우 희미한 금 한 줄이 그어졌을 뿐이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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