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운전석)은 후보 시절 윤장현 광주시장(오른쪽)이 추진하는 ‘광주형 일자리’를 노동 공약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노동시장이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지 오래다. 한편에는 임금이 높고 고용 안정이 보장되며 풍부한 복지까지 향유하는 소수의 일자리들이 있다(1차 노동시장). 다른 한편에는 임금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하며 기업 복지는 꿈도 못 꿈꾸는 다수의 일자리들이 있다(2차 노동시장). 2차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은 그나마 가능하지만 지속하기 어렵다. 1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기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노동시장이 양극화된 상태에서 좋은 일자리의 제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 창출에 별 성과가 없다. 한국의 노사관계로는 이런 난국에 대처할 수 없다. 노동조합은 이미 좋은 일자리를 잡은 소수의 자리에 주로 포진하고 있을 뿐이다. 격차 해소나 일자리 확대 같은 주제는 노사관계의 의제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다. 적어도 과거와 똑같은 방식을 되풀이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른 경로를 따라 다른 행위자들이 노동정책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의 한복판으로 치고 들어가 위기의 절실함을 움켜쥐고, 분석하고, 다른 나라 사례를 뒤지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바늘구멍을 통과할 의지를 벼려야 한다.

이른바 ‘광주형 일자리 창출 모델’은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2014년에 출범했다. 지속 가능한 노사관계 모델을 광주시가 조성 중인 산업단지에서 만들어보자는 것이 목표다. 일자리 창출 기회를 늘리는 동시에 노동시장 내의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모든 노동자가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2차 노동시장으로 추락하지 않으면서 1차 노동시장의 좋은 여건들에 근접하는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런 모델을 ‘광주형 일자리’로 명명했다.

‘광주형 일자리’의 노동자는 적정 노동시간만큼 일하고 적정 임금을 받는다. 참여적이고 소통적인 노사관계를 지향한다. 하청업체의 일자리 상황도 함께 고려한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투자를 유인하면서 일자리 간의 격차를 줄여나갈 수 있다. 이 같은 새로운 노동시장 질서를 기존 노사 주체들이 만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주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광역자치단체인 광주시가 이런 문제의식을 안고 새로운 노동시장 질서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선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지방정부는 고용이나 노동 쪽 정책에서 할 일이 별로 없다. 노사관계나 산업정책에 개입하거나, 노동시장 제도를 운영할 수 있는 지위도 아니다. 기업들에게 뭔가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제재를 가할 수단도 없다. 이런 광주시가 노동문제를 풀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연합뉴스2016년 4월15일 윤장현 광주시장(가운데)이 ‘친환경 자동차 선도도시 조성 범시민 확산 캠페인’을 열고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다만 광주시 혼자 이 실험을 추진하겠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지역사회 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대화를 통해 노동 관련 협약의 주춧돌을 놓을 ‘힘’에 한번 기대보자고 했다. 지방정부가 일자리 개혁을 향한 사회운동을 벌인 셈이다. 광주시는 2014년 사회통합추진단이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었다. 광주형 일자리를 실현하고 확산하는 것을 고유 업무로 삼는 부서다. 외곽에 사회통합지원센터를 두어 광주형 일자리와 관련한 지역사회의 소통 및 조직화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2016년, 지역 내에 노동시장 관련 주요 이해당사자 기관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 기구로 ‘더 나은 일자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광주형 일자리 관련 의제들을 공유하고, 이를 사회협약으로 구현해내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 13차 실무회의까지 열렸다.


광주형 일자리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전략적 대상은 자동차 산업이다. 광주에 남아 있는 그나마 알짜배기 제조업체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이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구현할 산업단지에도 자동차 생산기지를 확충해 일자리 창출을 모색할 계획이다. 산업과 고용, 그리고 노사관계를 종합적으로 포괄하는 혁신안을 고안해내서 ‘광주형 일자리 창출 모델’의 대표 사례로 삼고자 한다. 이 계획에 따르면, 산업단지에 ‘혁신공장’으로 별도 법인을 만들고, 해당 기업에서 ‘적정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노동조건을 설계한다. 적정임금은 기아차 같은 원청업체 임금보다 낮은 수준이지만, 하청기업 가운데 가장 높은 임금에 비해서는 살짝 웃도는 수준에서 형성되리라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노동시간과 복지 측면의 개선도 고려한다. 나아가 노동자의 숙련과 참여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생산 시스템을 구축한다.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기회도 늘릴 수 있도록 한다. 하청업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적정단가’를 보장하며 상생 관계를 유지한다.

광주시와 노동조합 간 협의가 성패 관건

이미 지난 정부에서 3000억원 이상을 투입해서, 친환경 부품 클러스터를 지향하는 산업단지(일명 ‘빛그린산단’)를 광주시 인근에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전기차 생산을 선도해가는 방식으로 투자가 이뤄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실현이 단지 자동차 공장에서만 이뤄질 필요는 없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기존 일자리 양질화’ ‘신규 일자리 창출’ ‘일자리 질서의 조정’ 등을 도모하면서 노동시장 불평등의 완화에 기여하려는 정책적 시도들은 모두 광주형 일자리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광주시는 민주노총 산하 전국공공운수노조와 협의해 산하 공기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들의 정규직화를 이뤄냈다.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기회도 모색 중이다. 일부 산하기관에서는 ‘노동자 이사제’를 도입하려고 시도 중이다. 사용자인 광주시 당국과 노동조합 간 협의가 성패의 관건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막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노동정책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미 대통령 선거운동 때 문재인 후보는 광주형 일자리를 자신의 일자리 공약 중 하나로 천명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성공과 확산을 위한 지원도 약속했다. 중앙정부가 뚜렷이 방향타를 제시했으니 이제 대기업과 해당 노동조합의 호응이 기다려진다. 대화부터 시작하자. 의지가 중요하다. 조만간 광주에서 주변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포괄적 사회협약을 체결해 호소할 것이라고 하니 우리 사회 노동시장의 강자들이 꼭 반응해주기를 기대한다.

기자명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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