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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첫차’가 출발했다

진보·호남당과 보수·영남당의 대립이라는 기본 구도가 흔들린다. 수도권 중산층, PK 유권자, 50대가 보수에서 이탈하고 있다. 보수는 기존 양강 구도로의 회귀를 원한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7년 05월 18일 목요일 제5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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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 그 이상의 거대한 변화가 반쯤 시작됐다. 한 세대 후의 연구자들은 2017년 대통령 선거를 1987년 대선 이후 가장 중요한 대선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30년 묵은 한국 정치의 문법이 근본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유권자의 투표 행태는 늘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지속성과 복원력이 강하다. 한번 정착한 기본 구도는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대선과 1990년 3당 합당을 거치면서, 한국 정치는 지역 구도를 바탕에 깐 진보·호남당과 보수·영남당의 경쟁으로 고착됐다. 이처럼 기본 구도를 짜는 선거를 정치학자들은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라고 부른다.

2017년 대선이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정치의 기본 구도를 다시 재편하는 정초선거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 보수 블록이 구조적으로 쪼개지고, 쪼그라들었다. 보수를 대표했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득표율 24%를 기록했다. 막판 그의 상승세 탓에 ‘선전했다’는 착시가 일어났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보수 정당 역사에 유례가 없는 참패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6.8%)의 득표율을 합해도 보수 후보가 얻은 표는 30.8%다. 여전히 민주화 이후 최악의 성적표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취임선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의 충격파는 중요했다. 하지만 박근혜 게이트 이전인 2016년 4월 총선부터 이어지는 구조적인 유권자 지형 변동이 참패의 바탕에 깔려 있다. 수도권의 자산 소유 보수표, 영남 보수 연합의 한 축인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장·노년 보수 동맹의 한 축인 50대, 이 세 축이 동시에 흔들린다(<시사IN> 제504호 ‘3년만 참으면 보수가 살아난다?’ 기사 참조).

이번 대선에서도 자산 소유 보수표와 부울경과 50대의 이탈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왼쪽 <표> 참조). 자산 소유 보수표의 아성인 서울 강남구에서 보수의 득표율은 2012년 대선 60.1%에서 2017년 대선 26.8%로 빠졌다. 부산은 59.8%에서 32%로 주저앉았다. 세대별 득표율은 개표 결과만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50대 지지 성향은 출구조사 결과를 사용했다. 62.5%가 26.8%로 추락했다. 자유한국당은 60대 이상 노인과 대구·경북의 정당으로 고립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심대한 지형 변화다. 그렇다면 2017년 선거는 정초선거인가? 일단 자격은 갖췄다. 하지만 당장은 확정할 수 없다. 미국 선거 연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초선거는 1932년 대선이다.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오랜 공화당 시대를 끝내고 민주당 시대를 열어젖힌 첫 선거다. 1932년 대선 이후 민주당은 1964년 대선까지 아홉 번 중 일곱 번을 이겨 백악관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유권자 지형이 일시적으로 흔들렸는지 구조적으로 재편성되었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1932년 선거의 구조 변동이 ‘뉴딜 체제’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한참 후다.

2007년 한국 대선은 중요한 반례다. 이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당시 대통합민주신당)는 26.1%를 얻어, 48.8%를 얻은 이명박 후보(당시 한나라당)에게 참패했다. 2017년 대선과 좌우만 뒤바뀐 판박이다. 2007년 대선은 한국 정치의 기본 구조가 압도적 보수 우위로 재편되는 입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 실정과 무리한 강경 드라이브로 개혁·진보 유권자 블록을 되살려주었다. 불과 2년6개월 후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며 기존 구도가 고스란히 복원된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의 미래에 결정적 질문은 이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루스벨트의 길과 이명박의 길 중 어느 곳을 향하게 될까? 유권자 지형의 구조 변동을 안착시켜 ‘뉴딜 체제’를 완성해낸 루스벨트의 길을 간다면, 훗날 2017년 대선은 정초선거로 평가받게 된다. 무너진 상대 진영을 재건시켜주는 이명박의 길을 간다면, 2017년 대선은 마치 2007년 대선이 그랬듯 단순한 막간극이 된다. 구조 변동의 징후는 분명하다. 이를 포착해 키워내느냐 혹은 과거 지형으로 복원시키느냐는 정치 지도자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자유한국당은 ‘복원’을 노린다. 어떻게든 기존 구도로 돌아가야만 자유한국당에 미래가 있다. 포석은 벌써 시작됐다. 첫째, 기존 양당 구도를 복원하려 한다. 둘째, “적폐 청산이냐 협치냐”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으로 집요하게 새 정부를 가두려 한다.

첫째 포석부터 보자. 홍준표 후보는 대선 이틀 후인 5월11일 선거대책위원회 만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남 1·2중대(민주당과 국민의당)는 통합될 것이다.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은 대립이 더 극심해질 거다. 자기들 마음대로 하도록 절대 안 놔둔다.” 거대 여당의 등장을 경계하는 듯한 말이다. 하지만 맥락은 오히려 둘의 통합을 기대하는 의미에 가깝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통합하면, 바른정당은 독자 생존도 어렵고 연대·연합정치의 공간도 좁아진다. 바른정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따라서 높아진다. 기존 양당 구도로의 복원력이 작동한다. 그래서 홍 후보의 본심을 더 잘 보여주는 말은 만찬 이후 기자들에게 한 이 발언이다. “바른정당은 없어진 것과 같고, 국민의당도 (곧) 없어진다. 정의당은 기생 정당이다. 어차피 양강 구도다.” 양강 구도가 복원되면 보수 정당은 지금 빠져 있는 함정인 ‘극단화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 지지 기반이 좁아질수록 극단파가 득세하고, 극단파가 득세할수록 지지 기반은 더 좁아진다. 이 악순환이 탄핵 이후의 자유한국당을 끊임없이 옥죄고 있다. 양당 구도의 복원 및 바른정당과의 통합은 당의 무게중심을 가운데로 옮겨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편’을 노린다. 기존 양당 구도의 복원은 재편의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민주당·국민의당 통합은 쉽게 상상하고 시도해볼 만한 선택지다. 입법부 의석 부족에 시달릴 새 정부에게는 특히 매력 있다. 하지만 이 경로는 집권당과 보수 야당을 동시에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재편’보다는 ‘복원’에 더 기울 수 있다.

정당정치 이론가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을 정초선거로 만들 중요한 기회를 잡았다.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여당 몸집 불리기의 유혹을 견뎌낸다면, 협력과 압박을 교차하며 5당 구도를 잘 다뤄낸다면, 한국 정치의 기본 구도를 재설정할 기회가 온다. 자유한국당을 대구·경북에 고립시켜 ‘극우 자민련’으로 만들 가능성도 있다.” 교착상태로 빠지기 쉬운 양당 구도보다, 야당끼리의 일치단결도 쉽지 않은 5당 구도가, 대통령이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더 낫고 유권자 지형 재편을 가속화하기에도 유리하다는 의미다. 이 5당 구도가 2018년 지방선거까지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다당제에 걸맞은 선거제도로 바꾸자는 요구가 분출할 수도 있다.

ⓒ연합뉴스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이낙연 국무총리, 서훈 국정원장, 임종석 비서실장 후보자를 소개하고 있다(왼쪽 두 번째부터).

보수가 놓은 두 번째 포석은 더 미묘하고 까다롭다.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보수 블록은 “적폐 청산이냐 통합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대선 다음 날인 5월10일자 <조선일보>가 전형을 보여준다. ‘적폐 청산 매달리면 협치는 물거품’이라는 제목의 논설고문 칼럼에서 <조선일보>는, 새 정부가 적폐 청산을 내려놓고 협치 노선을 골라야 한다고 썼다. 5월12일에는 자유한국당 논평이 이 양자택일 질문을 이어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철회하고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도록 결정하자, 자유한국당은 “통합과 협치의 시대정신에 반한다”라고 논평했다.

보수의 가짜 질문, “적폐 청산이냐 통합이냐”


양자택일형 질문은 보수의 꽃놀이패다. 문 대통령이 ‘협치’를 택하면서 개혁 의지를 꺾는다면, 보수는 개혁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고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층은 이반한다. 반대로 문 대통령이 ‘적폐 청산’을 택한다면, 그때는 “통합과 협치의 시대정신에 반한다. 대통령이 결국 지지자들만의 대장으로 돌아갔다”라며 반대파를 결집한다. 선명한 단일 전선이 복원된다. 양자택일형 질문을 받았을 때 “적폐 청산이 우선이다”라고 정면으로 받아치는 것이 핵심 지지층의 입맛에는 맞다. 하지만 이 경로가 문재인 대통령 처지에서 그럴듯하지 않은 것은, 단호한 태도와 달리 보수에게 그리 나쁜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수의 이 양자택일형 질문은 일종의 ‘가짜 질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30~33쪽 기사 참조). “적폐 청산이냐 통합이냐”라는 양자택일 자체가 허구라는 의미다. 왜 그럴까?

정치세력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쟁점에도 두 종류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철회는 일부 보수 블록이 강하게 저항하지만, 일반 유권자 사이에서는 철회 찬성으로 사실상 합의가 끝난 이슈다. 2016년 12월 1주차 한국갤럽 정례조사에서, 교과서 국정화 찬성 여론은 17%, 반대 여론은 67%였다. 검찰·국정원 개혁, 박근혜 게이트 진상 규명, 세월호 의혹 해소 등도 비슷하게 합의가 끝난 이슈다. 대선 과정에서도 홍준표 후보를 제외한 주요 후보들 사이에 사실상 이견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이슈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공격적 통합’이라는 제3의 선택지를 손에 쥘 수 있다. 합의 기반이 넓은 이슈를 다루는 전장에서는, 과감한 공세가 통합을 오히려 촉진한다. 거기에 동의하는 유권자 기반이 탄탄해서다. 그래서 양자택일의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선례를 가장 잘 보여준 전임자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군대 내 사조직 청산과 금융실명제 등 지지 기반이 아주 넓은 초대형 개혁 의제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저항은 시끌시끌했지만 통합은 붕괴되지 않았다. 취임 1년차 지지율은 80%를 넘나드는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시사IN 조남진
3월1일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주최의 집회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반대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이슈도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 문제는 저임금·취약층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충돌한다. 조세 개혁, 복지 자원 배분, 연금 개혁 등도 속성이 비슷하다.

진짜 갈등 이슈에서도 “청산이냐 통합이냐”라는 양자택일은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진짜 갈등 이슈를 적폐 청산하듯 밀어붙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조차도 공무원 연금 개혁과 같은 진짜 갈등 이슈에서는 입법부와 이해당사자 등과의 조율 과정에서 상당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갈등 이슈야말로 통합 외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 보수가 취약할 대로 취약해진 문재인 정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진짜 갈등 이슈를 힘으로 돌파하려는 순간, 보수가 간절히 원하는 ‘선명한 전선’이 복원된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정치가 힘을 발휘할 공간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옛 전선을 복원하지 않고 다당제를 다루는 정치력과, “청산이냐 통합이냐”라는 ‘가짜 질문’을 뛰어넘는 정치력을 요구받고 있다. 두 전선에서 문 대통령의 과제는 자유한국당이 노리는 ‘복원’을 저지하고, 개혁·진보 우위로 ‘재편’되어가는 새로운 정치 지형을 굳히는 것이다. ‘루스벨트의 길’이다.

이 도전에 성공을 거둔다면 2017년 대선의 의미는 정권교체를 훌쩍 뛰어넘게 된다. 2017년 대선은 새로운 정치 지형이 탄생하는 첫 선거, 후대의 논평자들이 ‘2017년 체제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물론 반대로 정치체제 특유의 강고한 복원력이 작동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보수 정치권의 사정에 밝은 한 전직 국회의원은 “자유한국당의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은 문재인이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기존 양당 구도를 복원해주는 ‘이명박의 길’을 가리라 기대하고, 그리 되도록 유인한다는 의미다.  

이런 특별한 시기에 지도자가 되는 행운은 대통령이라고 해도 누구나 누릴 수는 없다. 대통령 문재인은 ‘새 시대의 첫차’가 될 수 있는, 진정으로 드물고 중대한 기회에 그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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