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각각 경력 17년, 15년의 베테랑인 KBS 배창복·이상협 아나운서(왼쪽부터)가 ‘고막 아재’를 자청했다.
식빵, 치즈, 수프, 야채샐러드, 두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아나운서 특유의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저음으로 “국가공인 건강식단표”인 서울구치소 4월 마지막 주 주말 재소자용 식단이 흘러나왔다. 배경음악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왔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3막 중 여성 이중창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 왜 식단표를 읽는지, 배경음악 선곡 이유는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지만 청취자는 이미 배꼽을 잡았다. 아직도 웃지 못했다면 서울구치소에 계신 분들의 면면을 생각해보자. ‘피가로의 결혼’이 프랑스 대혁명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주장까지 떠올렸다면 당신도 ‘웃음 지뢰’를 제대로 밟은 셈이다.

4월24일 팟빵과 아이튠스에 첫 업로드된 팟캐스트 〈오디오 진정제〉가 입소문을 탔다. 5월12일 현재 모두 10개 에피소드가 업로드되어 있다. 짧게는 5분, 길어봤자 11분 내외로 듣기에 부담이 없다.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저음으로 삶에 지친 여러분을 진정”시켜준다는데 하루 1440분 중 10분쯤이야 충분히 내맡겨도 좋지 싶어진다.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시는 것도 권장”하는 〈오디오 진정제〉의 두 진행자는 KBS 배창복·이상협 아나운서다. 각각 경력 17년, 15년의 베테랑 아나운서가 ‘고막 아재’를 자청했다. 듣다 보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재능 낭비’를 하나 싶어지는데, 다 일리가 있었다. “표준어와 표준 발음의 ‘기준’을 제공하는 공영방송에서 제작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디오 진정제〉의 김어흥 작가 말이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시겠지만 정확한 발음이 정확한 소통의 기본입니다”라는 이상협 아나운서의 말도 흘려듣지 말자.

방송은 이상협 아나운서의 노트 속 한 줄짜리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아무거나 읽어드립니다.” 이를 본 배창복 아나운서가 먼저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사내 공모가 있어서 지원했다가 덜컥 선정됐다. 커피값 정도의 ‘아주 약간의 지원금’으로 친하게 지내던 동료인 김홍범 PD, 김어흥 작가와 함께 팀을 꾸렸다. 녹음실도 따로 배정되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을 굶어가며 ‘도둑 녹음’을 한다.

아무거나, 무엇이든 읽는 것 같지만 목소리에 ‘뼈’를 담았다. 2회 ‘표준 양돈법’을 녹음할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의 ‘돼지흥분제’ 이슈가 한창이던 때였다. 배경음악은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의 OST ‘시대의 바람-사람이 사람다웠던 때’. 5회 ‘충남 홍성군 사전투표소 위치 외 1편’에서는 투표소 주소를 읊는다. 충남 홍성군은 지난 선거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지역이다. 물론 ‘시즌 방송’도 잊지 않는다. 어린이날에는 애니메이션 〈헬로 카봇〉 주제가를 읽고, 대선 직후에는 새 대통령의 10대 공약을 낭독하는 식이다.

팟빵 ‘문화 및 예술’ 순위 1위에 오르는 바람에 회사에서도 이 ‘한낱 팟캐스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냥 재밌자고 시작한 일이 조금 커졌다. 5월15일부터 KBS 쿨FM 〈이수지의 가요광장〉의 고정 코너가 됐다. 물론 ‘수위 조절’에 들어갔다. 팟캐스트도 계속할 예정이다. 메인은 ‘진정제’이지만 때로는 흥분제도 되고, 소화제로도 변신 가능하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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