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지층이 유입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기존 진보 정당 지지층과는 결이 다르다. 여성 그리고 청년이다. 수치로도 드러난다.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20대에서 12.7%를 얻었다. 출구조사 전체에서 심 후보가 얻은 득표율(5.9%)의 두 배가 넘는다. 한국갤럽이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인 5월7~8일 조사한 결과에서도 20대의 13%가 심 후보를 지지했다. ‘젊은 층으로부터 외면받는 노쇠한 진보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탈색됐다. 같은 조사에서 여성(8%) 또한 남성(6%)보다 더 높게 심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의당 당직자들이 체감한 현장 분위기는 그보다 더했다. 선거 유세 때마다 여성과 청년의 호응이 확 느껴졌다. 심상정 후보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성 소수자·청년의 모습이 선거운동 기간 내내 화제가 될 정도였다.(〈시사IN〉 제503호 “심상정이 다녀가면 늘 눈물이 남았다” 기사 참조).

정의당에 쏟아진 후원금을 낸 이들도 주로 여성이었다. 대선 직전 두 자릿수 득표율까지 바라봤던 심상정 후보의 실제 득표율이 그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오자 대선 당일 저녁부터 ‘지못미’ 후원금이 답지하기 시작했다. 금액은 2억8000만원에 달했다. 김종철 정의당 서울시당 공동위원장은 “후원금을 보낸 이들 가운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걸로 파악된다.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지난 4월25일 서울 마포구 공덕시장에서 유권자를 만나는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

이처럼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텔레비전 토론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심 후보가 유력한 남성 대선 주자 네 명에게 맞서 토론을 주도하는 모습은 퍽 상징적이었다. 둘째, 심 후보의 1호 공약이 획기적인 육아정책을 제시한 ‘슈퍼우먼 방지법’이었다. 셋째, 텔레비전 토론에서 1분 찬스를 신청해 성 소수자를 위해 발언했던 장면이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울림을 주었다. 넷째,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노동자 정당임을 전면화했다. 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여성과 사회적 약자다.

정의당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판단이 서 있었다. 당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운동 이전 유권자를 상대로 집단 심층면접(Focus Group Interview)을 실시한 결과 유권자들이 느끼는 심상정 후보의 이미지는 ‘내 편 들어줄 것 같은 센 언니’였다. 한때 회자되었던 ‘심블리’(심상정+러블리)와는 사뭇 달랐다. 선거 캠프의 메시지도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게로 초점이 맞춰졌다.

심상정 후보는 2007년 이후 10년 만에 원내 진보 정당 후보로서 대선을 완주했다. 지난 대선 때는 제1야당 문재인 후보와 야권 단일화로 중도 사퇴했다. 이번 19대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얻은 표는 201만7458표(6.17%). 선거 막바지 지지율이 치솟으며 10% 이상으로 기대한 득표율에는 못 미쳤지만, 역대 대선 결과를 되짚어보면 의미심장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 정당 계열이 처음 독자적으로 대선에 도전한 것은 1992년이었다. 당시 무소속 백기완 후보가 23만8000표(1%)를 얻었다. 1997년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 역시 30만6000표(1.2%)를 얻는 데 그쳤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으로 결집한 독자 정치세력은 권영길 후보를 내세워 95만7000표(3.93%)를 득표하며 기염을 토했다. 19대 대선 전까지 이것이 진보 정당 최고 득표였다. 2007년에는 당 내분 등으로 득표율이 하락했고, 2012년에는 중도 사퇴했다. 득표수로만 보면 이번 대선에서 진보 정당은 1992년보다 열 배, 2002년보다도 두 배가량 성장했다.

물론 2004년 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투표 결과(277만 표)나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투표 결과(219만 표)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총선과 대선은 다르다. 한국 정치판의 양강 구도 속에서 그동안 진보 정당 후보는 대선 때마다 후보 단일화 또는 사퇴 압박을 받아왔다. “진보 정당에 주는 표는 죽은 표”라는 ‘사표론’도 대선 때마다 만연했다. 진보 정당 지지자들은 자기 당 후보의 지지율이 사표론에 휩쓸려 주저앉는 꼴을 지켜보곤 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어김없이 사표론이 등장했다. 문재인 후보의 독주가 이어지면서 과거보다 강도는 훨씬 덜했지만, 선거운동 후반부 보수 세력의 결집이 예측되면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정의당 지지는 다음 선거에 해도 되지 않나”라며 불을 지폈다. 실제로 이번 대선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에서도 지난해 총선에서 정의당을 지지했던 이들 가운데 55.2%가 문재인 후보 지지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이 끝난 직후 우상호 원내대표가 “정의당이 양해해달라”며 수습에 나섰지만 앙금은 가시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층과 정의당 지지층 간에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가는 양상이다. 대선 과정에서 심상정 후보가 참여정부를 비판한 데 반발한 일부 민주당 지지자는 다음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정의당에 표를 주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고, 정의당 지지자는 거대 정당 지지자의 횡포라며 반발했다.

대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표론’

정의당은 수면 아래에서 갑론을박 중이다. 이 기회에 집권당인 민주당과 더욱 차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민주당 지지층까지 껴안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대선 완주 이후 소기의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받는 현 시점에서는 독자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우세해 보인다. 선거대책위원회 홍보본부장을 맡았던 강상구 전 정의당 대변인은 〈시사IN〉과 한 인터뷰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의당이 누구를 보고 진보 정치를 해나갈지 명확해졌다. 다음번 선거에서 표를 주지 않겠다는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공격은 위협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지지층을 바라보고 진보 정당으로서 선명성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이야기다. 반면 또 다른 정의당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 지키기에 나선 지지자들이 진보 정당을 공격 타깃으로 삼는 빌미를 줄 필요는 없다”라며 조심스러운 대응을 주문했다.

오는 7월 정의당 당직선거 때 이런 논의가 불붙을 전망이다. 대선 도전 25년 만에 200만 표를 손에 쥔 진보 정당이 새로운 정치 지형을 일궈낼 수 있을까. 10년 만의 정권교체 이후 어쩌면 가장 주목되는 이슈일지도 모른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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