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대통령 선거는 언제나 겨울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후보 모두 추운 겨울날 당선되어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 말에 임기를 시작했다. ‘장미 대선’이든 ‘촛불 대선’이든 이번에는 따뜻한 5월에 대통령을 뽑고, 대통령은 곧바로 임기를 시작한다. 광장의 촛불은 박근혜의 대통령 임기를 1년 이상 단축시켰고(12월9일 직무정지로 사실상 임기 종료) 우리는 예정보다 9개월 먼저 새 대통령을 맞이한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 중 파면과 구속이라는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이, 역사에는 이 땅의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증명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촛불’로 기록될 것이니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로도 그 미묘한 감정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혹독하게 추웠던 2012년 12월19일 밤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제주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주민들, 용산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 그리고 핵발전소와 송전탑에 맞서 싸우는 밀양 주민들과 함께 대한문 앞 ‘함께살자 농성촌’에서 제18대 대통령 당선 확정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소주 몇 병을 마셨는지 모른다. 어떤 말로도 참담한 심정이 위로되지 않는 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날만을 기다리며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의 개막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시사IN 신선영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이 3만, 20만, 100만, 200만명으로 점점 늘어났다. 각자 일상에서 마주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해고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파업투쟁 중이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농성장에 계속 날아들었다. 우리는 대한문 농성장에서 사흘에 한 번씩 추모제를 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박근혜 정권의 시작은 재벌의 시대, 가진 자들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억압받고 차별받던 이들에게는 박근혜의 5년을 더 견딜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해 겨울 그 ‘죽음’과 ‘죽임’을 잊을 수 없다.

예상대로 박근혜 정부는 1%의 편에 서서 99%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특유의 오만과 불통은 세월호 참사 같은 엄청난 비극 앞에서도 요지부동이었고, 현직 국회의원을 여섯 명이나 보유한 정당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은 풀리지 않은 채, 박근혜 정권은 전교조 법외노조화,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개성공단 폐쇄,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경찰 살수차에 의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 기습적인 사드 배치 선언 등으로 쉴 사이 없이 국민들을 궁지로 몰아붙였다. 박근혜 정부의 4년은 이명박 정부의 5년을 가볍게 능가하는 참담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국민들의 절규에는 귀를 닫고, 몸부림 앞에서는 눈을 감던, 저 참담한 권력자가 청와대에서 끌려나와 감옥에 들어가는 날, “정말 이렇게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라는 희망이 싹텄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3만, 20만, 100만, 200만으로 점점 늘어가는 감동의 시공간을 가장 가까이서 절절히 느끼며 걸어온 사람으로서 박근혜 다음 시대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계속 질문했다. 역시 우리는 광장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학습했고 부당함에 맞서 당당하게 저항하는 법을 체득했다. 공권력의 강제력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선택한 비폭력 집회는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힘을 발휘했다. 성별과 세대,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어 차별과 혐오가 발붙일 곳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광장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회를 성장시킬 소중한 기회를 맞았다. 각자 일상에서 마주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또 투표를 한다. 온전히 마음을 사로잡은 후보가 없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박근혜’를 청와대에 앉히지 않으려면 제대로 투표하는 수밖에 없다. 기권도 중요한 정치적 의사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투표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원치 않는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기억하자. 마음속에 장미 한 송이 아니 촛불 하나씩 담고 투표장으로 가자. 그리고 다음 대통령이 다시 권력에 취해 갈피를 못 잡거든 그 촛불을 꺼내 들고 광장에서 만나자.

 

기자명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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