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자크 라캉의 격언 중 하나다. 나는 철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저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말할 자격이 부여된다면, 다음과 같은 첨언 정도는 하고 싶다. 음악평론가로서 나의 숙명 역시 끝끝내 방황하는 것에 있을 거라고.

그대, 혹시 〈러덜리스〉라는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가? 얼마 전 블루레이로 출시된 이 영화, 일단 음악이 끝내주니 아직 보지 못했다면 꼭 한번 감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은 내가 영혼의 파트너 김세윤 작가의 영역인 영화 쪽을 침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 음악이 갖는 의미’에 대해 논해볼 작정이다. 내 판단에, 이 의미는 글의 시작에 쓴 저 문장,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줄거리는 빼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본다. “당신은 과연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연히 영화를 보면, 내가 왜 이런 질문을 여러분께 던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러덜리스〉(사진)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받아들인다’는 명제에 질문을 던진다.

대중음악 쪽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신봉해왔다. 이 개념의 핵심은 간단하다. “작가의 내면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작품에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거다. 자연스레 둘이 궁극에서 만나는 그 순간, 작가와 작품은 동일시된다. 진정성의 비호 아래 저 유명한 비틀스를 필두로 수많은 뮤지션·밴드들이 아티스트로 대접받았고, 그들은 과거 클래식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건 포스트모던이 도래하면서부터였다. 작가와 작품을 별개로 사고하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예를 들어 산울림의 전설 김창완씨는 어떤 인터뷰에서 “작품이 발표되면 그것은 나와는 더 이상 상관없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로 한번 되새김질해보자. 창작자야 열외로 치더라도, 그것의 소비자인 우리는 진정 이런 방식으로 ‘지속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영원히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러덜리스〉는 이 질문을 극단적인 상황 속에 놓아버린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살인자의 노래를 오로지 미학적으로만 재단할 수 있는가? 살인자의 노래라는 것을 모른 채 그것이 진실로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살인자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 같은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설을 위한 출구는 본래 없는 법이니까.

살인자의 노래를 미학적으로만 재단한다?

어쩌면 이 음악 영화가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기를. 뭔가가 편하지 않다는 느낌은 곧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만한 문턱에 당신이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는 명제를 당신이 믿는다면, 그 방황이 불편하지 않다면, 〈러덜리스〉는 ‘인생작’이 되기에 충분한 음악 영화다. 잘 말해지지 않은 것을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러덜리스(Rudderless)라는 제목처럼 주인공은 방향을 잃은 삶을 보낸다. 음악 속에서 그는 스스로의 인생에서 망명한 채 갈지자로 방황하고, 고뇌한다. 요컨대, 그것은 인생(의 비극)이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어떻게든 속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와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수시로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추악하지만은 않은 생존자가 될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바라고 또 바란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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