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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 말이 없는 황무지의 시신

이언 브래디와 마이라 힌들리는 키스 베넷을 비롯해 미성년자 다섯 명을 죽였다. 살인 후 황무지에 시신을 유기했는데 키스 베넷의 시신은 50년 동안 찾지 못했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4월 20일 목요일 제5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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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 ‘무어(moor)’는 무어 사람(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무슬림)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황무지를 말하기도 한다. 불그스름하거나 누르스름한 풀 또는 이끼로 덮여 있는 매우 눅눅한 땅이다. 그럴듯한 나무는 없고 고작 있는 것이라고는 낮은 잡목들 약간이다. 언덕 지형이지만 가파르지 않아서 멀리 또 다른 황무지가 건너다보인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광활한 무어를 지나가다 보면 그 황량함에 질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도무지 신선해 보이지 않는 벌판과 가끔 보이는 바윗덩어리뿐이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무선전화도 잡히지 않는 지역이 많기 때문에 폭풍우라도 치는 날 길에서 벗어나 방향을 잃으면 그냥 끝장이겠구나 싶다.

그러니 가끔 생각하는데, 자기 집 안의 창고(garage) 바닥을 제외한다면 무어는 영국에서 최고의 살인 및 시체 유기 장소일 듯하다. 물론 시신이라도 찾아 죽은 자와 산 자에게 안식을 주고자 하는 가족에게는 최악의 장소일 것이다. 50여 년간 시신을 찾아 헤매는 키스 베넷의 가족에게는 말이다.

전 세계 무어의 20% 정도가 영국에 있다고 하는데(무어는 영국에만 있는 특수한 지형은 아니다), 영국 내에는 유명한 무어가 20여 곳이나  있다. 코난 도일의 소설    <바스커빌의 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다시 찾을 수 없곤 했다는 황무지는 남서쪽 데번의 다트 무어 이야기다. 그리고 브래디와 힌들리 커플이 키스 베넷의 시체를 파묻은 곳은 북쪽 그레이트 맨체스터 지역의 새들워스 무어다.

ⓒDaily Mirror 갈무리
10대 아이 다섯 명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살해한 이언 브래디(왼쪽)와 그의 애인이자 공범인 마이라 힌들리.
이언 브래디와 마이라 힌들리는 키스 베넷을 포함해 10세에서 17세까지 희생자 다섯 명을 죽였다. 1963년 7월에서 1965년 10월 사이에 벌인 일이었다. 그중 넷을 죽이기 전에 성폭행했다. 셋을 무어에서 죽였으며 넷은 무어에 파묻었고, 마지막 한 명을 무어에 묻으려던 전날 체포되었다.

불우하고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 각각 18세와 23세에 만난 힌들리와 브래디는 통제와 폭행과 살인에 대한 기호를 키웠고, 완벽한 살인을 꿈꾸었다. 실제로 마지막 범행을 목격한 이가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그들이 저지른 범행은 거의 완벽했다고 할 수 있다. 경찰은 잇따른 실종 사건에 대해 아무런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범행 방식은 거의 유사했다. 주로 브래디가 범행 대상을 고르고, 경계심을 덜기 위해 여성인 힌들리가 접근을 한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를 차에 태운다. 그렇게 납치해서 성폭행하고 목을 조르거나 칼로 베어 죽이고 무어에 파묻는 것이다. 첫 번째 희생자는 16세 소녀였다. 힌들리 여동생의 친구였다. 그다음은 12세 소년이었다. 세 번째 희생자가 키스 베넷이었다. 역시 12세 소년이었다. 네 번째는 가장 어린 10세 소녀였다. 이들은 소녀를 납치해서 자기들의 집으로 데려갔다. 사진을 찍고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소녀를 묶고 재갈을 물린 뒤 옷을 벗겨 강제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앞선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강간을 한 뒤 역시 죽여서 시체를 새들워스 무어로 옮겨 땅에 묻었다. 이들은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애원하는 것을 녹음해 16분짜리 테이프로 만들었다. 후일 소녀의 엄마는 녹음테이프를 듣고 그것이 자기 딸의 목소리라는 것을 확인했다.

1965년 10월6일 브래디가 17세 소년을 도끼로 내리쳐 죽이는 것을 목격한 브래디의 제부는, 이튿날 와서 시체를 무어로 운반하고 처리하는 것을 돕기로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힌들리의 여동생인 자기 아내에게 목격한 것을 이야기하자, 어린 아내는 공포에 질려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브래디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칼과 도끼로 무장하고 나서야 경찰에 전화를 걸러 나갔다.

ⓒThe SUN 갈무리
경찰 수색대가 새들워스 무어에서 키스 베넷의 시신을 찾고 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베넷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다음 날 브래디와 힌들리는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은 집안을 수색하다가 힌들리가 기도서 뒷면에 숨겨놓은 물품 보관증을 찾아냈다. 이들이 10세 소녀를 고문하면서 찍은 사진과 테이프는 트렁크에 담겨 맨체스터 중앙역 물품 보관소에 맡겨져 있었다. 집 안에서 다른 실종 소년의 소지품이 발견되자 경찰은 이들을 실종 청소년들에 대한 살인 혐의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찍은 수많은 무어 사진을 단서로 경찰은 사진 속 해당 지역을 수색했다. 10월15일 10세 소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무덤을 깊이 파지 않아서 시신의 팔이 튀어 나와 있었다. 닷새 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나머지 두 건에 관해 밝혀진 것은 20년이 경과해서였다. 이미 범인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였다. 1985년 브래디는 기자에게 자기가 두 건의 살인을 더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경찰은 두 사람의 시신에 대한 수색을 재개했다. 1986년 12월 경찰은 힌들리를 헬리콥터에 태워 무어로 데려갔다. 시체를 찾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무어를 통과하는 모든 길을 막고 경찰 수백명이 동원된 대대적인 수색은 실패했다.

가족들은 여전히 시신을 수색하고 있다

이듬해, 힌들리가 총 다섯 건의 살인에 대해 정식 자백을 했다. 다만 본인은 아이들의 납치에만 가담했을 뿐 성폭행이나 살인을 직접 저지르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경찰은 힌들리를 다시 무어로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한층 더 경비가 삼엄해졌다. 무어에서 하루 묵으면서 힌들리는 기억을 더듬어 시체가 묻혀 있을 듯한 장소를 몇 군데 지적했다.

1987년 7월, 경찰은 소녀의 시체를 찾아냈다. 이들이 죽인 첫 번째 희생자였다. 실종된 지 24년 만이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겨우 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소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래디는 정식으로 자백을 했고 마지막 남은 키스 베넷의 시신 수색에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경찰은 브래디를 무어로 데리고 갔으나 그는 시신을 묻은 장소를 찾아내지 못했다. 인파가 몰려들자 경찰은 브래디를 현장에서 철수하도록 했다. 경찰은 그해 말 브래디를 한 번 더 무어로 데리고 갔으나 역시 수색은 실패로 돌아갔다.

경찰은 소년의 시체를 찾기 위한 작전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2009년 아무런 성과 없이 이를 종료해야만 했다. 새로운 단서가 없었다.

아이들의 사망은 남은 가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부모들은 병이 들거나 이혼했고, 범인들의 가석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베넷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찾을 것이라는 소망을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고, 감옥의 힌들리와 브래디에게 시신을 묻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여러 차례 간청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힌들리는 끊임없이 살인과 무관함을 주장하고 가석방을 신청했지만 2002년 60세에 감옥에서 병사했다. 베넷의 어머니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12년 암으로 사망했다. 아들의 안경과 같이 묻혔다. 향년 78세였다. 남은 가족들은 여전히 시신 수색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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