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류성(infallibility)이라는 미국의 전염병.’ 지난 3월21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폴 크루그먼 교수의 칼럼이다.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은 진실이며,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에 실수나 오류는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실수에 대해서도 병적일 정도로 책임을 지지 않는 지도자’가 트럼프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의 행정부에 기대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무오류성’ 명제는 비단 트럼프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이라크 침공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에서 일체의 오류와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던 부시 전 대통령도 같은 부류라고 지적한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미국 기득권 세력의 오만이 깔렸다는 것이다.

북한 핵 문제가 계속 풀리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미국 엘리트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져 있는 이 ‘무오류 명제’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 따라 동결되었던 북한 핵은 2002년 이후 계속 악화되었다. 이제 북한은 20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다섯 차례 핵시험을 감행했는가 하면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다종화의 성공을 공언하고 있다.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도 최종 개발 단계에 와 있다. 이러한 사태 악화의 일차적 책임은 북한에 있지만 미국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북한의 핵 보유 명분이 대미 핵억지력 구축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 사례는 한 번도 없고 모든 것을 북한의 정치·군사적 모험주의와 중국의 비협조 탓으로 돌렸다. 과거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나 유감 표명도 없고 이전 정책의 실패에 대한 학습도 없었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이 계속 꼬인 진짜 이유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지켜져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었다면 북핵 문제는 결코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2001년 취임한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의 대북 화해 정책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을 전개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방침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으니 대화와 협상을 통해 풀어나가자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가 이를 거부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하는 동시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미래의 위협인 HEU 때문에 어렵게 동결되었던 현재의 위협인 플루토늄(PU) 프로그램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꺼냈다.

그뿐 아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기로 했고,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폐기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서 체결 하루 만에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을 통해 대북 금융제재를 가하고 말았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은 1차 핵시험으로 대응했다. 2007년 2·13 합의로 북핵 문제 타결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지만 이번에는 불능화 단계의 검증 문제로 판이 깨졌다. 이 같은 명백한 오류에도 부시 행정부의 어느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시도 오바마도 트럼프도 모두 북한 탓으로 돌려

오바마 행정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화와 협상, 그리고 제재와 압박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 제재와 압박만 있었지 제대로 된 대화와 협상은 없었기 때문이다. 2012년 2월29일 합의 실패 때문이다. 이 합의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의 동결을 약속했지만 합의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로켓 시험발사를 강행하면서 미국은 그런 북한을 신뢰할 수 없다고 보았다. 북한이 비핵화의 가시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는 한 북한과의 대화는 없다고 못 박은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미 인수위 시절부터 북한과의 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실상 부시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그냥 이어받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어떤가? 공식적으로 ‘전략적 인내 정책’의 폐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 발언을 보자. “북한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트럼프 대통령).” “비핵화 없이 북한과의 대화는 없다(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 “6자회담 틀로는 복귀하지 않겠다(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중국은 유엔안보리 제재 이행해야(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오바마 행정부의 재탕이다. 과거 정책에 대한 치밀한 검토와 반성이 없다. 불행하게도 ‘무오류성’이라는 미국 전염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북핵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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