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만 보면 그의 말이 떠오른다. 하늘 한 조각 보려고 비행기 타고 6시간을 왔다던 여행기의 첫 문장.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 못한 채 노트북에, 회의 탁자에 고개를 파묻는 노동의 날들, 사무실 복도와 지하철 통로와 집으로 연결된 통로에 하늘은 없다. 개미굴 같은 일상에서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음’마저 넘어서. ‘더 이상 살 수 없음’마저 넘어서(12쪽).” 휴가를 떠나서야 밀린 방학 숙제처럼 밀린 하늘을 누린다.
벚꽃 시즌이면 그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벚꽃을 볼 거 같아요? 안 봐요. 사진만 찍지. 어느 노 문학가의 일침.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지만 벚꽃 구경은 벚꽃들의 기자회견. 셔터가 마구 터진다. “직접 경험은 카메라가 하고, 화면이 한다. 더 이상 매일매일 번역할 경험은 증발하고 없는가 보다(92쪽).”
시집만 보면 그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정말 어려운데 다른 책으로 하면 안 돼요? 글쓰기 수업 교재 목록에서 시집을 빼자던 하얀 얼굴. 시집을 훑어봤는데 한국말로 돼 있고 어려운 단어가 없는데도 독해 불가라고 하소연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선생님은 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이해하시는 거예요?(205쪽)”
나는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를 본다. 허수경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을 편다. 머리말 격인 자서가 나온다. 활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스승은 병중이시고 시절은 봄이다. 속수무책의 봄을 맞고 보내며 시집을 묶는다. 사랑은 나를 회전시킬까, 나는 사랑을 회전시킬 수 있을까, 회전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나는 이제 떨쳐나가려 한다.”
속수무책의 봄, 흐드러진 봄 풍경이 연상된다. ‘사랑은 나를 회전시킬까’에서 탁 걸린다. 회전시키는 건 돌리는 건데. 사랑이 나를 빙글빙글 돌린다. 세상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건가. 분간할 수 없게 어지럽히는 건가. 내가 사랑을 회전시킨다니, 사랑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건가. 떨쳐 떠나간다는 건 회전축을 벗어나가겠다는 의지일까. 말을 곱씹고 뜻을 헤아리며 사랑, 회전, 떨침에 대한 내 앙상한 생각이 드러난다. 겸허한 마음으로 시집에 입장.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에게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 환하고 아프다.”
첫 시 ‘공터의 사랑’을 읽다가 2연에서 멈춘다. 내가 사랑을 버리는 게 아니라 사랑이 나를 버린다. 주체의 전복. 사랑이 행위의 주체다. 나도 버리고 그대도 버리고 세월에게 가버린다. 그렇다. 사랑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본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뭐람. 상처도 늙겠지. 근데 왜 환하지? 환함의 속성을 꼽아본다. 환하면 잘 보인다. 만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상처가 잘 보이고 그러면 볼 때마다 아프겠지. ‘환하고 아프다’는 조합이 ‘어둡고 아프다’보다 더 아프게 느껴진다.
시에는 오직 당신의 대답이 있어요
이는 단지 내 느낌에 충실한 시 읽기다. 국어 교과서로 시를 배울 때처럼 참고서가 없으니 내 경험을 참조한다. 이해 안 되는 말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수용한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순해진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 말의 맥을 짚다 보면 감각이, 기억이, 정신이 깨어난다. 원초적인 나에게로 돌아온다. 자아 몰입도, 단어 민감도, 세계 투시도를 높여주는 시는 글쓰기에도 유용하다. 시를 교재로 넣는 이유다.
“난해한 미술이나 음악엔 관대하지만, 난해한 문학엔 화를 낸다.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작품은 아마 이해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느껴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저 바라보기만 해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205쪽).” 김혜순 시인이 쓴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를 펴면 시의 육성이 들린다. 시가 어렵다고 화내지 마세요. “읽을 때마다 다른 방향,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 시(57쪽).” 그저 느껴만 주셔도 돼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백 가지가 있고, 그 오백 가지를 시간과 장소, 기분, 듣는 사람, 날씨 등등의 경우의 수에 적용한 만큼 대답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189쪽).” 시에는 정답이 없기에 오답도 없답니다. 오직 당신의 대답이 있어요.
하늘을 보는 일, 꽃을 보는 일, 시를 보는 일은 닮았다. 정답 강박을 내려놓고 자기 느낌에 집중하는 시 읽기는, 여섯 시간 걸려 비행기를 타는 일만큼 작정하고 일상의 틈을 내야 하는 일이고 사진을 찍지 않고 벚꽃을 들여다보는 일만큼 인내심을 요구하는 과업이다. “시는 사라지고 유행가, 타령, 잠언, 수필, 소문의 진위, 간신히 비유만 남(224쪽)”은 시대에 시집을 펼치고 느낌을 붙든다. 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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