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받아놓고, 모리치오 비롤리의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안티고네, 2017)를 읽었다. 지은이는 오늘의 대의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못했던 이 책에서 고작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투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후보가 없다면 덜 나쁜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의식 있는 시민들이 투표하지 않고 집에 머문다면 의식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의회나 백악관에 가서 공공선을 해칠 정책들을 펼칠 부패하거나 능력 없는 후보들을 뽑을 것이다.”

지은이는 ‘선거는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뽑는 것 혹은 선거는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세간의 속설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되풀이한다. 그는 지혜로 위장된 저 속임수가 대의제 정당민주주의를 병들게 한 원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더 이상 ‘덜 나쁜 후보에게 투표하라!’는 사탕발림에 속는 것을 거부한다.

차선은 최선에 가까이 있는 것이어야 할까, 최선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어야 할까? 당연히 차선은 최선과 가까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선거판의 차선은 최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심상정과 이재명은 어떤 정책에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최선에 가깝지만, 유권자들은 차선을 선택한다면서 최선과 더 먼 거리에 있는 후보를 찍는다. 반대로 최악이 아닌 차악은 최악과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최악과 멀면 멀수록 좋은 것이어야 한다. 심상정과 이재명은 어떤 정책에서 우리 시대가 최악이라고 간주한 것과 가장 먼 거리에 있지만, 유권자들은 차악을 선택한다면서 최악과 가장 근접한 후보를 택한다.

ⓒ이지영 그림
진보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면서부터 “훌륭한 후보가 없다면 덜 나쁜 후보에게 투표”하라는 금언도 따라서 무색한 충고가 되었다.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 진보가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오른쪽으로 옮긴 결과 차선은 최선과 유리되어간 반면, 차악은 최악에 밀착해갔다. 예컨대 사드나 재벌 개혁 등의 현안에서 문재인과 안희정은 최선과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차선이자, 최악과 가장 가까이 있는 차악이다. 진보 야바위꾼들은 단어의 엄밀한 의미를 전도시킨 이런 행태를 중도니, 대연정이니, ‘뉴’민주당이라는 허울로 포장한다.

한국보다 보름 정도 앞서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프랑스의 사정은 훌륭한 후보는 없고 덜 나쁜 후보밖에 고를 게 없는 오늘날의 대의제 정당민주주의의 곤경을 보여준다.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는 공금횡령과 기업자산 오용, 개인자산 미신고 혐의로 프랑스 재무검찰에 기소 중이다. 마린 르펜 국민전선 후보는 자신의 비서실장과 경호원을 유럽의회 보좌관으로 허위 고용했다는 의혹으로 경찰에 기소됐다. 무소속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 역시 경제장관 재직 시 특정 기업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프랑스 대선의 3대 유력 후보 모두가 부패에 연루된 것이다. 자신의 안보관을 증명한답시고 전두환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고 떠벌리는 문재인이나, 보수 유권자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기 이름이 박정희의 ‘정희’를 뒤집어 만든 것이라고 자랑하는 안희정이나 다를 게 뭔가? 안희정 지지자들은 문재인 아들 문준용의 한국고용정보원 채용 의혹을 물고 늘어지지만, 안희정이야말로 16대 대통령 선거 때 불법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돈 가운데 2억원을 자신의 아파트 중도금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든 온갖 후보 가운데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징역을 산 사람이 안희정 말고 누가 있는가? 이런 원인들이 투표장으로 향해야 할 유권자들의 발걸음을 끊는다.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모리치오 비롤리 지음
김재중 옮김
안티고네 펴냄
유권자를 투표장에 불러내지 못한 정치권의 책임

점점 낮아지는 투표율은 민주주의의 적신호다. 그래서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는 투표를 하지 않을 때 불이익을 주는 의무투표제를 시행한다. 농담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는 투표지에 고유 번호를 매긴 다음 투표 당일 추첨하여 상금을 주자는 ‘투표지 로또’ 아이디어(유시민)까지 나왔다. 투표율을 올리기 위한 이런 상벌 정책의 근본적 모순은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정치권에 책임을 묻지 않고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유권자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불러내지 못한 정치권의 책임이 더 큰데도,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투표 거부자를 범죄인 취급한다.

전 세계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저조한 투표율 문제의 해결책은 더는 투표율을 높이는 것에 있지 않다. 온갖 상벌로도 낮아지는 투표율을 막을 수 없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면,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의 수(數) 혹은 그들의 의사를 정치에 계산·반영·기입하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 예컨대 그 대(代)의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율이 당선자의 대표성을 인정해줄 수 있는 적정선(55% 정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당선자의 당선 취소는 물론이고, 그 대에 나온 대통령 후보들의 차기 대통령 출마권을 영원히 빼앗는 것이다. 그 대의 대통령 후보가 몇 명이 되었든, 그들이 동원한 투표율의 총량이 55%가 되지 않는다면, 유권자들이 그들 전체를 불신임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많다. 첫째, 그동안 한국의 여당은 자당 후보의 당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청년층의 투표율이 저조하기를 기대했고, 반대로 야당은 노년층의 투표율을 낮추려고 애써왔다. 이런 작태는 대의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하는 공당(公黨)의 태도가 아니다. 낮은 투표율과 후보 불신임(영구 퇴출)을 연동한다면 공당들은 더 이상 반민주주의적인 책략을 멈추고, 유권자를 감동시킬 정책 경쟁을 벌일 것이다. 둘째, 투표율이 적정선을 넘어서지 못해서 그 대의 후보들을 모두 퇴출시킬 수 있다면, 정치권의 물갈이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셋째는, 그동안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무시되어왔던 투표 거부자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여태까지 현행 정치권에 대한 거부 의사를 투표를 하지 않는 것으로 표시해왔지만, 정작 정치는 투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왔다. 즉 투표 거부자의 적극적인 정치 행위는 늘 투표하는 사람들끼리 “덜 나쁜 후보”를 뽑는 것으로 원천 무효가 되어왔다. 낮은 투표율과 후보 불신임(영구 퇴출) 선거제도는 제도 정치권 내의 A나 B 혹은 C·D·E·F… 그들끼리의 짬짜미가 아닌, 그동안 자기 목소리를 전달할 수 없었던 진정한 제3지대(투표 거부자)의 조직적 투표 거부 운동을 만들어낸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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