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오바마케어를 ‘트럼프케어’로 대체하는 것이 최근까지 잇따른 정치적 재앙을 극복할 절호의 기회였다. 오바마케어는 2010년 발효 이후, 미국 역대 행정부의 숙원인 ‘전체 국민에 대한 건강보험’ 시대를 열었다는 찬사를 받아왔다. 그러나 공화당은 모든 국민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가입하지 않으면 벌금 납부)한 오바마케어를 가리켜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법안’이라고 규정했다. 2009년 이후 공화당이 오바마케어를 폐기하기 위해 벌인 이런저런 당 차원의 시도가 60차례 이상이다. 트럼프 역시 대선 유세 기간에 68차례나 ‘오바마케어 폐기’를 외쳤다. 트럼프가 승리하고,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오바마케어 폐기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당내 ‘반란세력’의 저항 앞에 칼도 빼보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바로 공화당 내 강경 보수파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Freedom Caucus)’다. 오바마케어에 대한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의 주장은 ‘완전 폐기’다. 이들은 백악관과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마련한 트럼프케어가 오바마케어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바마케어 관련 조항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트럼프케어에 찬성할 수 없다고 버텼다.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에게 오바마케어는 물론 트럼프케어 역시, 시민 개인의 자유를 해치는 정부 개입이며 “납세자의 돈을 보험사로 퍼주는 신종 복지정책”일 뿐이다. 결국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트럼프케어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표결 상정 자체를 철회했다. 트럼프도 막판까지 반대파 의원들에게 회유와 설득, 협박을 거듭했으나 결국 백기를 들었다.
공화당의 단합도, 민주당과 협치도 모두 난망
트럼프는 연방대법관 인준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가 지명한 닐 고서치 후보자를 민주당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닐 고서치를 부적합자로 간주하면서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로 제동을 건 상태다. 미국에서 새 행정부 첫 100일 동안은 의회의 공화·민주 양당이 관례적으로 정쟁을 멈추고 대통령에게 협조한다. 트럼프 정부는 예외다.
이런 정치적 불행을 자초한 장본인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다. 대통령직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사업가적 발상만으로 너무 안이하고 오만하게 국정 의제들을 밀어붙이다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브루스 미로프 뉴욕 주립대학 교수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연방정부는 헌법이 규율한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상상보다 훨씬 복잡하게 돌아간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난국에서 빠져나올 길은 있을까? 정치 분석가들이 제시한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우군인 공화당의 100% 단합을 이뤄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야당인 민주당과의 협치다. 대통령에 취임해서도 야당과 타협을 모르며 독불장군 행태로 일관해온 트럼프로서는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먼저 공화당 단합과 관련해 최대 걸림돌은 오바마케어 폐기안을 좌초시킨 하원의 프리덤 코커스다. 현재 하원 의석 비율은 공화당 237명, 민주당 193명으로 공화당이 다수다. 공화당 의원 중 최대 40명이 프리덤 코커스 소속이라 이들 중 절반만 표결에 협조하지 않아도 트럼프의 국정은 표류가 불가피하다.
프리덤 코커스가 계속 국정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민주당과의 협치뿐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솔직히 말해 민주당 의원들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라인스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은 보수 성향 〈폭스 뉴스〉에 나가 세제 개편, 인프라 구축, 규제 해제 등 트럼프 정부의 핵심 국정 의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민주당에 구애의 손짓을 보냈다. “트럼프는 당략적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젠 온건파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노력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는 세제 개편안과 인프라 구축 법안을 동시에 의회에 상정해 처리할 계획이다. 일자리 창출과 직결돼 있는 인프라 구축 법안은 민주당의 협조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협조할까? 쉽지 않다. 트럼프의 가장 급한 현안은 4월28일 이전에 새로운 예산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방 예산안의 대폭 증액이 새 예산안의 핵심인데, 민주당은 이에 회의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세제 개편안을 빨리 확정해야 한다. 고소득자 대폭 감세와 상속세 폐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역시 민주당이 협조하기 힘든 사안이다. 상원 민주당 원내 대표인 척 슈머 의원은 ABC 방송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오바마케어 폐지 시도에서 보인 실수를 세제 개편안에서 반복하려 한다”라고 맹비난했다.
민주당은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트럼프가 지명한 닐 고서치 연방대법관 후보를 적극 저지하고 있는 민주당은 하원 정보위원회의 트럼프 측근인 데빈 누네스 위원장에게는 사퇴를 요구 중이다. 데빈 누네스는 러시아 게이트를 덮기 위해 ‘미국 정보기관이 트럼프의 정권인수위원회를 사찰한다’라고 떠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오바마케어 폐지안 무산으로 공화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 빠지면서 민주당은 지난해 11월 선거 참패 이후 최상의 입지를 확보했다. 민주당이 난국에 처한 공화당에 구조 손길을 뻗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관측했다. 실제 민주당은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지금 같은 난국에서 헤어나지 못할 경우 내년 11월 의회 중간선거 때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러시아 게이트’ 수사로 탄핵안 거론될 수도
이처럼 트럼프가 공화당 내 강경파 프리덤 코커스의 협조도, 민주당과의 협치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국정이 계속 표류할 경우 레임덕은 가속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대선 유세 당시 트럼프 캠프 관련 인사들이 러시아 측과 부적절한 접촉을 했는지 수사 중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만일 수사 결과, 양측의 부적절한 접촉이 사실로 확인되면 의회에서 트럼프 탄핵안이 거론될 수도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러시아와 공모했다는 의혹으로 FBI 수사를 받기는 트럼프가 처음이다. 게다가 상원 정보위원회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설을 초당적으로 파헤치겠다고 결의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레임덕을 돌파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는, 국정 수행에 대한 국민적 지지다. 그러나 이마저도 암울하다. 여론조사 기관 갤럽의 3월29일자 발표에 따르면 트럼프에 대한 직무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저인 35%에 불과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9년 1월 취임 후 비슷한 시기에 누린 63% 지지율과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역사학자들에 의해 역대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조지 W. 부시 전 공화당 대통령의 53%에도 훨씬 못 미친다. NBC 방송은 “이 정도 지지율이라면 어느 대통령을 막론하고 실존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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