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리본과 하얀 종이 가루가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하늘색 연단에서 두 후보가 부둥켜안았다. 승자는 유승민 후보였다. 3월28일 바른정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서 유 후보는 남경필 후보(37.1%)를 제치고 득표율 62.9%를 확보했다.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는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 절망하는 국민이 없도록 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당연해 보이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그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낙인을 찍은 전직 대통령은 그로부터 사흘 후 구속 수감되었다.

정치 여정의 시작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이끌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이었던 그는 2000년 2월, 한나라당 산하 정책 연구기관인 여의도연구소(현 여의도연구원) 소장으로 발탁된다. 지금이야 정당법상 정책 연구기관에 정당보조금의 30%를 배분하지만, 당시에는 월 가용예산이 3000만원도 안 되던 작은 기관에 불과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42세 연구원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재벌 정책을 관료주의적 관치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당 산하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3년 넘게 그는 ‘이회창의 경제 과외선생’으로 통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정책적 조언자였고, 대선 직후에는 이회창의 측근으로 통했다.
 

ⓒ연합뉴스3월29일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 후보가 남경필 경기도지사에게 업혀 손을 흔들고 있다.

탄핵 역풍이 분 2004년 17대 총선,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를 선택했고, 새 인물이 대거 원내에 진입했다. 경제학자 출신 신인 정치인 유승민 역시 비례 14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박근혜 시대’에 우여곡절을 겪은 원조 친박이 대부분 이 선거에서 등장했다. 당선 직후인 2005년, 유승민 의원은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에 오르면서 ‘원조 친박’의 시대를 연다.

이때 유승민은 ‘시장질서 왜곡에 반대하는’ 경제학자 포지션에 가까웠다. 그러나 TK의 중심인 대구에 자리를 잡으며 그는 점차 ‘정통파 보수’의 길로 들어선다. 대구에 깃발을 꽂은 과정이 이례적이었다. 초선 2년차이던 2005년 10월, 그는 비례대표 의원직을 내던지고 대구 동구을 지역구 재선거에 출마했다. 박근혜 당시 당 대표의 의중이었다. 당시 선거에서 유 후보는 ‘정권교체’와 ‘박근혜’를 앞세워 승리를 거뒀고, 이 지역에서 내리 4선에 성공한다.

유 후보는 18대 국회부터 국회 국방위원회 붙박이로 통했다. 19대 국회에서는 국방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보수적 안보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TK 출신·경제학자의 이력이 겹치면서 당내 정통파 보수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의 졸속 협상으로 논란이 된 사드(THAAD)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경제와 사회 문제는 개혁적이지만 안보만은 보수적이다”라는 평가를 이때부터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정치적 홀로서기도 시도했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유승민 후보는 ‘이변의 2위’를 만들어내며 최고위원 자리에 올랐다. 기간은 길지 않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선관위 디도스 사건으로 홍준표 체제가 흔들리자, 유승민 당시 최고위원은 과감히 사퇴 카드를 내밀었다. 2011년 12월7일 유승민·원희룡·남경필 최고위원의 사퇴는 곧바로 홍준표 당 대표의 사퇴(12월9일)로 이어졌고, 구원투수 박근혜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등판’의 문을 연 그는 차츰 ‘탈박(脫박근혜)’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명칭 사용에 대해 “특정 종교가 연상되는 당명”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했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도 중용되지 못했다.

대구 출신 여당 정치인, 2세 정치인, 서울대 출신 엘리트, 학자 출신 등이 유승민을 설명하는 키워드였다. 3선에 성공한 19대 국회 초반에도 그를 차기 대선 주자로 언급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당내 갈등 양상은 박근혜 대통령 대 김무성 당 대표 구도로 압축되었다. 그러다 2015년, 1년마다 새로 선출하는 ‘원내대표’ 선거가 다가왔다. 당시 선거에서 친박은 이주영 의원을 지원했다. 정권 3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친박의 기세가 강할 때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유승민 84표, 이주영 65표. 2014년 10월7일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얼라(어린아이)들”이라며 문고리 권력을 꼬집은 유 후보를 당내 의원들이 밀어준 것만으로도 ‘(박근혜 정부) 레임덕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연합뉴스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운데)가 대구 동구을 지역구 재선거에 출마한 유승민 후보(맨 오른쪽)와 함께 유세에 나섰다.

‘탄압받는 비박’의 상징이 되다

2015년 4월8일, 원내대표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사건’이 발생한다. 국회 본회의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세월호 인양, 복지 증대, 양극화 해소, 증세, 사회적 경제 등을 언급하며 개혁적 보수의 방향을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방향과 충돌했다. 반면 야당으로부터는 ‘명연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해 6월, 정부 시행령을 국회가 수정·변경토록 요구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자, 청와대로부터 압박이 들어왔다. 6월25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친박계는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를 흔들기 시작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와 함께 이런 말을 남겼다.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주셔야 한다.” 그를 겨냥한 독설이었다.

결국 7월8일,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 사퇴 권고 결의안’이 가결되자 유승민 당시 원내대표가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라며 자신이 2주간 버틴 이유를 설명했다. 특정 인물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정치가 2주간 펼쳐지자, 사람들은 유승민이라는 이름을 선명하게 각인했다. 이듬해 총선까지 그는 ‘탄압받는 비박’의 상징이 되었다. 당내 친박계는 유승민과 가까운 인사들을 공천에서 줄줄이 탈락시켰고, 노골적으로 ‘진박(진실한 친박)’ 마케팅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차기 대권 주자로 이름값을 올렸다.

박근혜 게이트를 거치면서 정권은 자멸하고, 당은 둘로 쪼개졌다. 대선 출마, 경선 승리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몇 가지 딜레마에 처했다. 그는 ‘보수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다. 경제·사회 분야에서 양극화 해소와 개혁적 과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여전히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을 향해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막아야 한다”라고 외친다.

정통 보수를 외치지만, 대통령 탄핵과 구속을 반대하는 극단적 보수층은 유 후보에게 ‘배신자’의 굴레를 씌워놓았다. 지지율도 답보 상태다. 한국갤럽의 주간 정례 여론조사에서 유 후보의 지지율은 박근혜 게이트 이후 5%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유승민의 딜레마는 바른정당의 딜레마와 같다. 보수 정당 재편에 나섰지만, 극단적 보수층과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유권자 그룹 사이에서 몸집 불리기에 실패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 정당 간 후보 단일화 가능성을 묻지만, 유 후보가 선을 긋고 있다. 3월28일 유승민 후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의 단일화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홍 후보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대법원 재판을 나가야 한다. 나는 홍준표 지사가 출마할 때부터 부정적이었다.” 자유한국당 개혁에 나서겠다던 인명진 비대위원장마저 사퇴하면서, 당내 주도권이 다시 친박에게 쏠리는 현상도 단일화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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