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검색엔진 구글은 메인 화면에 여성 인물 13인을 선정해 자사 로고 대신 띄웠다. 화가 프리다 칼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등을 지나자 익숙한 옷, 한복이 눈에 띄었다. 한복 차림에 큼직한 안경을 쓰고 법정에서 변론하는 이는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여성 법학박사인 고 이태영 변호사(1914~1998)다.

어릴 적부터 변호사를 꿈꿨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감옥에 간 남편 정일형 목사 대신 자녀를 먼저 책임져야 했다. 광복 이후 남편은 “이제 보따리를 바꿔 멥시다”라는 말로 다시 찾은 나라에서 아내의 새 시작을 응원했다. 그렇게 네 아이의 엄마 이태영은 서울대학교 최초의 여자 법대생이 되었다.

이태영 변호사의 걸음마다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번번이 편견과 싸워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50년, 남편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자 이 변호사는 아내이자 지지자로 찬조 연설에 나섰다. 청중 사이에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말이 나오자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암탉이 울면 새벽이 온다”라고 받아쳤다. 이화여전 재학생 시절, “이혼감”이라는 야유에 굴하지 않고 한국 여성은 더 이상 인형이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여학생 웅변대회 1등을 거머쥐었던 인물다웠다.
 

ⓒ정켈 그림


1952년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등고시(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남성 중심적인 법조계에서 이 변호사의 존재는 ‘모난 돌’이었다. 법관실무수습생 시절에 가족법 개정 진정서를 제출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법조계 초년생이 건방지다” “1500만 여성이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살고 있는데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수습을 마치고 곧 법관으로 임명된 남자 동기들과 달리 이 변호사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여자 판사는 시기상조이며 이 변호사가 ‘야당(野黨)집 마누라’라는 이유로 임명을 거부한 까닭이다. 결국 법관에서 변호사로 진로를 틀어야 했다.

“1500만 여성이 불평 없이 잘 산다”라던 말이 무색하게 변호사 사무실 앞은 ‘첫 번째이자 단 하나뿐인 여성 변호사’를 찾아온 여성들로 ‘울음 골목’을 이뤘다. 법률구조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이태영 변호사는 아예 여성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소를 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자 변호사라 사건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상담소를 차린 게 아니냐는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확신에 찬 행동만이 역사를 한 치씩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변호사는 이후에도 호주제 폐지를 비롯해 법을 통해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40여 년간 한시도 순탄한 적이 없었다. 뜻을 같이하는 여성단체에게는 ‘노처녀’ ‘과부’ ‘패륜녀’라는 조롱이 뒤따랐다. 당초 도움을 약속했던 정치인들은 나중에는 “조용히 해결할 일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표가 되지 않는다”라며 말을 바꿨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겪어야 했던 수난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멀게는 서구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날아들었던 비난부터 가깝게는 최근의 여성혐오 표현들까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을 분열의 씨앗 혹은 열등한 존재로 폄하하려는 시도는 이렇게 길고도 지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좌절 속에서도 “인간 차별 역사의 상속인이 결코 되지 않겠다”라던 이 변호사의 생전 다짐은 조금 느리지만 분명하게 실현됐다. 그가 세상을 뜬 지 7년이 지난 2005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호주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호주제가 없으면 가정이 무너진다던 주장 대신,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확신에 찬 행동만이 역사를 한 치씩 변화시킬 수 있다”라며 한평생을 꿋꿋이 걸어간 이태영의 이름 석 자다. 이태영 변호사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 증명해낸 이 진리야말로 109번째 여성의 날을 맞은 2017년의 전 세계 여성들에게 가장 반가운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기자명 양정민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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