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연이어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청와대 통일비서관, 1998년 김대중 정부 통일부 차관과 2002~2004년 통일부 장관을 지낸 그는 대북협상론자다. 1971년 7·4 남북공동성명 이래 남북한 사이에 체결된 143개 합의문 중 73개가 그의 손을 거쳤다. 장관 재임 중에는 남북대화만 95차례 열어 개성공단 착공과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연결사업을 이끌어냈다. 그는 현재 문재인 대선 후보 자문단인 ‘10년의 힘 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북한 핵·미사일, 사드 배치,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문제 등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정세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정세현 상임대표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에도 정부가 사드 배치를 속전속결로 처리하는데?

자꾸 사드를 기정사실화하고 5월 대선 전에 사드 배치를 완료하겠다는 식으로 밀어붙여서 새 정부에서 더 이상 어떻게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려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한국 외교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중국과의 관계는 끝나고 앞으로 미국 편에서만 살아야 한다.

사드 배치를 서두르는 까닭은?

정부는 지난해 7월 2017년 연말까지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헌재에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자 국방부는 최근 “조기 대선 전에 배치를 끝낸다”라고 밝혔다. 즉, 4월 말이나 5월 초에 배치를 완료하겠다는 의미다. 이것은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 사드를 배치하지 못하리라 보고 대못을 박으려는 것이다.

사드의 실효성 논란도 있는데?

북핵 미사일 방어를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사드는 우리 군이 필요해 사서 배치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주한 미군기지에 갖다 놓으면서 북한 핵과 미사일도 막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 아닌가. 사드는 미국이 대중국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의 군사 활동을 감시하고 군사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 들여오는 무기체계다. 극동러시아 감시 효과까지 노리고 있다.

정부는 북한 미사일과 핵무기 방어용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 안보는 북한의 1000㎞ 이내 미사일을 방어하는 것이 핵심이라 사드 같은 큰 무기는 필요가 없다. 그동안 추진했던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면 충분하다. 사드를 배치한다고 하자 중국이 제일 먼저 크게 반발하며 경제 보복까지 시작했다. 북한의 반발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에 배치되는 사드가 대북용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이 아주 잘 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당연히 다음 정부가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당신네 필요에 의해 사드를 들여놓았는데 우리가 죽을 지경이다. 중국으로부터 보복이 들어오는데 우리 국민이 당장 어려워지면 한·미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 어차피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정책 때문에 배치해야 한다면 중국과 러시아를 잘 감시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재검토해달라’는 식으로 좀 시간을 벌면서 설득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에 그런 설득이 통할까?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새로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탄핵 뒤 조기 대선 전에 배치하겠다고 밀어붙이던 상황에서 최근 미국 측으로부터 즉각 배치가 아니라 6~8월 배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까지 부랴부랴 미국에 가서 당장 배치를 추진했는데 미국에서 생뚱맞게 6~8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보안 누설이 아니라 미국이 의도적으로 흘렸다고 본다. 미·중 정상회담이 4월 초에 열리게 된다. 그 자리에서 사드 문제를 포함해 미국과 중국이 빅딜을 시도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미국 쪽에서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면 4월 미·중 정상회담이 어려워지리라고 본 거 아니겠나.

사드 배치 문제도 미국이 중국과 협상하는 카드로 쓴다는 뜻인가?

물론이다. 사드 배치 문제가 미·중 정상회담에서 바게닝 칩(협상 카드)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도 ‘오바마 정부 때와 달리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움직일 테니 중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줘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고 나와라. 그러지 않으면 사드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이 될 것이다. 북핵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트럼프는 타협의 여지없이 자기 방침대로 밀고 가겠다고 압박할 것이다. 중국 스스로 불이익을 덜 받기 위해선 늦기 전에 빨리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전략 같다.

사드 배치가 연기된다면 다음 정부에서 할 일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사드 배치를 연기하면서 한·중 관계를 복원할 기회가 올 수 있다. 미국과 중국, 특히 미국의 대중국 정책 차원에서 사드 배치가 6~8월로 연기되면 다음 정부에 숨통이 좀 트인다.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서서 해결하면 좋지만 그게 아니고 큰 나라들끼리 빅딜을 통해서 해결되더라도 그나마 다행이다.

원론적인 질문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보나?

해양 대국인 미국과 대륙 국가인 중국 사이에서 외교를 잘하려면 남북관계를 우호적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1990년 이래 일관된 정책 기조였다. 노태우 정부 때 소련·중국과 수교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이를 토대로 한·중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과 우방 관계도 비교적 잘 끌고 나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한테 잘한답시고 중국과 척을 져서도 안 되고, 중국과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한다고 해서 미국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된다”라며 늘 균형 외교를 강조했다. 그런 기조가 노무현 정부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미국 일변도로 회귀했다. 그 결과 남북관계는 끊어지고, 그럴수록 미국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모든 사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자초한 거다.

 

 

ⓒ공군본부 제공3월22일 미 공군 전략폭격기 B-1B(맨 오른쪽)가 한국 공군 전투기와 함께 연합훈련을 하고 있다.


악화된 남북관계가 걸림돌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남북관계를 잘 관리하면 북한이 우리에게 군사적으로 위협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단절되면 북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미국에 더욱 안보를 의존한다. 그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중국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남북관계 악화는 일본과의 관계를 불리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일 관계 악화가 북한과 어떤 관련이 있나?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는 데 미·일 관계와 한·미 관계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한·일 관계 개선을 강하게 요구했다. 좌청룡·우백호 식으로 ‘좌일본·우한국’을 끌어가려고 했지만 한·일 관계가 개선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에다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압박했다. 위안부 문제 졸속 합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 10억 엔, 우리 돈으로 ‘정유라 말 값’ 정도로 위안부 문제를 아주 이상하게 합의해놓고 위안부 문제가 잘 해결됐다는 식으로 홍보했다. 10억 엔을 받고 소녀상을 철거해주기로 했다는 것 때문에 한·일 관계가 불편해졌다. 일본은 일본대로 돈 줬으니까 약속 지키라는 거고, 한국은 그런 약속을 한 적 없다는 식으로 한·일 정부가 지금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나? 주한 일본 대사가 자국으로 돌아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겁나서 주일 대사 소환도 못하고 있다(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 대사는 지난해 12월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일본으로 귀임한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한·중 관계만이 아니라 한·일 관계까지 최악이다.

트럼프는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를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전략적 인내’는 내용이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한의 선행동론’, 즉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자진해서 포기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북한이 먼저 행동하도록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거나 설득하라는 ‘중국 역할론’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아무것도 안 하고 중국이 나서서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도록 만들어놓으면 미국은 그때 회담에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국제정치 이론에 강대국이 작은 나라를 찍어 누르면 말을 듣더라는, 냉전 시대 이래의 고정관념이 있었다. 중국이 알아서 움직일 줄 알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G2 국가인 중국이 미국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리라고 기대하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중국한테 북핵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놓고 북핵 능력이 커진 다음에는 중국을 비난하는 게 미국의 북핵 문제에 대한 책임 전가 논리다.

트럼프 정부의 중국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최근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북한은 굉장히 위험한 국가다. 지금까지 미국을 갖고 놀았다”라고 표현했다. 북한 선행동론과 중국 역할론이라는 오바마 행정부 방식의 전략적 인내 정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북핵에 대처하겠다는 얘기다. 다른 방식은 제재와 협상을 병행하겠다는 뜻이라고 본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도 아직까지는 중국 역할론에 여지를 남겨두긴 했다. 지금까지 중국에게 북핵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면, 이제는 중국을 압박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중국이 북한을 끌고 나오게 하겠다는 ‘스리쿠션 전략’을 꺼낸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제재를 통해서 북한이 협상으로 나오도록 만들고, 한편으로 협상을 하다 안 되면 다시 제재를 가하는 식이다. 중국에 북한을 끌고 나오거나 설득하라고 맡겨만 놓지 않고 미국이 그 과정에 직접 나서겠다는 뜻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연합뉴스2002년 2월20일 한·미 정상회담 뒤 도라산역을 방문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침목에 서명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선제타격론’과 ‘김정은 암살작전’ 등이 자주 거론되는데?

회담장 밖에서 협상 전략으로 나도는 일종의 장외 압박 전술이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허튼짓 하지 말고 협상에 나오도록 토끼몰이를 하는 일종의 말 폭탄이 ‘선제타격론’과 ‘김정은 제거론’, 그리고 ‘체제교체론’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중국에 압력을 넣고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도록 해서 협상장에 끌고 나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대화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기다리겠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의 협상 전술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보다 진일보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미국이 직접 북한과 대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클린턴이나 부시 행정부 때는 직접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했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미국이 먼저 북한한테 만나자고 했다.

트럼프는 대선 운동 기간에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겠다고 했는데?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지금은 북한과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북한이 굽히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트럼프 정부에는 현재 국무부와 국방부에 대북 담당 라인이 없다. 이제 막 장관 청문회가 끝났다. 국무부와 국방부의 동아태 차관보가 지명되고, 청문회를 통과해 자리를 잡아야 부차관보가 팀을 짜고 그다음 북한 담당이 정해져 구체적인 실천 계획과 전략이 나온다. 한국 차기 대통령은 인수위원회도 없이 바로 취임한다. 이게 불행인 거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 실무진이 대북정책을 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상황을 주도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오는 5~6월이 한국 외교의 골든타임이라고 주장한 것도 그런 이유인가?

그렇다. 미국의 동아태 차관보 밑에 대중국· 대북 정책팀이 완전히 세팅되기 전 우리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 새 정부 출범 후 서둘러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놓고 구체적인 전략까지 짜면 미국은 준비가 덜 됐으니까 우리가 상황을 선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중국이 핵심이고, 중국을 관리하거나 압박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 하위 정책, 즉 하위 바게닝 칩으로 북한과 북핵 문제에 접근한다.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라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생각하고 그에 입각한 액션 플랜도 짜야 하지만, 미국은 우선순위나 중요도에서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대북정책이 구체적이지 않고 액션플랜도 그렇게 많지 않다.

조기 대선 기간에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로 남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할까?

핵과 미사일이 남한 위협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 처지에서는 미국이 몸 달아서 먼저 다가오도록 만드는 카드다. 대미 협상과 관련해 트럼프 정부가 대북 압박정책을 쓸 것 같으면 더 세게 치고 나갈 수 있다. 한국 대선 일정하고는 무관하게 그들의 대미 협상 차원에서 미국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게 유도할 수 있다면 그런 사고를 치고도 남는다. 예전에는 선거 때 남한이 북풍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자연풍으로 북풍이 불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미국을 가장 잘 다룬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이라 지정했던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내는 열정과 소신을 갖고 있었다. 9·11 테러 뒤인 2002년 1월29일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을 통해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이라 지정했다. 그날 아침에 김 대통령이 나를 통일부 장관에 임명했다. 나는 “미국이 북한을 군사 공격할 텐데 아무것도 못하고 한 1년 장관 책상만 지키다 나와야겠구나” 하고 낙심했다. 20일 뒤 부시 대통령이 방한해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할 테니 한국은 그리 알라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많았다.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보다도 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정상회담 결과를 기다렸다. 그날 회담 후 양 정상이 도라산역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나는 북한을 타격하는 대신 대화와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라고 뜻밖의 연설을 했다.

왜 갑자기 부시의 태도가 바뀌었나?

한·미 정상회담 100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그때 도라산역에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대통령 수행 열차에 내가 동석했는데 김 대통령이 “아까 연설 들었죠? 내가 오전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부시를 설득해 그런 연설을 하게 만들었소. 나는 할 일 다 했으니 나머지는 통일부 장관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김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당신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는데 같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 했다. 하지만 소련이 악마의 제국이기 때문에 그들과 꾸준히 대화를 추구해 결국 소련 체제를 변화시키지 않았느냐”라고 말해 부시 대통령을 감동시키고 태도를 바꾸게 했다. 그야말로 “NO라 할 줄 아는 DJ” 때문에 부시 대통령의 대북관과 대북정책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바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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