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맞았다. 아침 일찍 나갔던 주인은 해질 무렵에야 날품팔이를 마치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곳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소란스럽던 생명체가 자취를 감춘 지도 4개월이 넘었다.3월15일 저녁 충북 진천군 이월면 갈미농장. 닭장 여섯 동에서 닭 4만여 마리가 북적이던 이곳에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농장주가 숙소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빈 닭장을 비추는 CCTV만 돌아가고 있었다. 닭장 안에는 쓸모를 잃은 왕겨 포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난해 11월5일이 마지막 출하였다. 농장주 정원영씨는 지난해 8월9일 하림으로부터 토종 병아리 4만1900마리를 받았다. 이 가운데 3만9090마리를 성체로 키워 11월5일 하림에 되팔았다. 토종닭이라 88일이 걸렸다. 보통 닭은 한 마리를 키우는 데 40일가량이면 충분하다.닭을 한 번 출하하고 나면 한 달 뒤 새로운 병아리를 받는다. 새 병아리를 닭장에 들이는 걸 ‘입추(入雛)’라고 부른다. 국어사전에는 안 나오는 축산 용어다. 한 달 동안 닭똥을 치우고 닭장을 소독하고 왕겨를 바닥에 깔며 입추 준비를 한다. 계획대로면 12월6일 입추를 했어야 한다.
2017년 정유년은, 사상 최악의 닭띠 해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발생한 AI로 전국에서 3000만 마리가 넘는 닭이 살처분되었다. 역대 최대다. 올해 초 달걀 값이 치솟았고, 최근 닭고기 값도 폭등했다. 살처분과 이동제한으로 양계 농가는 패닉 상태다.살처분 농가는 닭고기 시세의 80%를 즉시 보상받는다. 100% 보상은 아닐지라도 우선 지급되므로 당장 숨통은 트인다. 그리고 이 보상금을 하림, 체리부로 등 닭고기 ‘계열 회사’가 사료비와 병아리비 명목으로 절반 이상 가져간다. 닭의 소유주는 농가로 되어 있지만, 이들 기업이 농가에 병아리 사육을 위탁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시사IN〉 제486호 ‘AI 뒤에서 누군가 웃는다’ 기사 참조).
심각한 건 정원영씨처럼 조류 이동제한 조치에 걸려 입추를 하지 못하는 경우다. 살처분은 면했지만, 사실상 휴업 상태다. 이번 AI 사태로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6개월까지 입추를 하지 못한 농가가 수두룩하다. 이들에게는 아직 피해 보상금이 한 푼도 지원되지 않았다. 정부가 내놓은 소득안정자금 기준을 놓고 양계 농가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부는 조류 이동제한에 따라 입추 지연 조치를 당한 농가에 과거 평균 소득의 80%를 소득안정자금으로 지급한다.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가 정한 지급 기준은 마리당 육계 183원, 토종닭 550원, 육용 오리 1019원, 산란계 2146원 등이다. 쉽게 말해 토종닭 1만 마리를 키우는 농가의 경우 ‘550원×1만 마리×80%=440만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정씨처럼 4만여 마리를 키우는 농가는 1800만원 정도를 받게 된다.
농식품부는 통계청과 관련 협회 자료를 바탕으로 소득 금액을 산출했다고 밝혔다. 양계 농가의 항의가 이어지자 농식품부는 사육비 책정이 계열회사별로 다르고 장려금·약품비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객관적인 소득 기준으로 보기 어렵다고 해명했다.이런 지급 기준은 현실에서 턱없이 모자란다. 정씨는 취재진에게 하림으로부터 받은 사육비 지급명세서를 보여줬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마지막 출하 때 정씨가 받은 마리당 사육비는 1101원이었다. 농식품부가 정한 기준(토종닭 550원)의 두 배다. 복잡한 계산을 치우면 기업 소속 농가의 실질소득은 ‘사육비×마릿수×출하 횟수’다. 토종닭의 경우 보통 1년에 3회 출하한다. 정씨의 경우 매년 1억원 남짓 돈을 벌었다. 농협에서 빌린 대출금 이자 등을 갚고 난 나머지가 정씨의 순수익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AI가 터지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정씨의 경우 설령 3월 안에 입추가 가능하다 해도 남은 사육 기간(88일)을 감안하면 8개월 가까이 노는 셈이다. 8개월 수입 총액이 소득안정자금 1800만원이라는 이야기다. 평소 소득과 차이가 너무 크다. 정씨는 “우리 농장은 AI 발생 농장도 아니었는데, 정부 지침에 따른 죄로 4개월 동안 1원도 못 벌었다. AI 발생 때마다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라고 말했다.
AI가 왜 발생한다고 보나? 이제 감기처럼 토착화했다고 봐야 한다. 중요한 건 최근 AI가 터진 곳이 거의 오리 농가라는 점이다. 오리가 추위에 강한 면이 있기 때문에 농장 온도 관리에 소홀하다. 추운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쉽게 감염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오리 농가에 겨울 난방비를 지급하자고 지자체 등에 요구한 적도 있다. 아니면 겨울에 오리 농가 휴지기를 갖고 냉동육을 유통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물론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오리업계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AI가 발생해도 신고하지 않고 몰래 유통시키는 농가도 있다던데? 글쎄, 일부 그런 농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계열사에 소속된 농가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출하 일주일 전 반드시 AI 검사를 하게 되어 있다. 양성반응이 나오면 살처분이다. 그런데 양성반응이 나온 닭을 며칠 지나 정밀검사하면 음성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젠 방역본부가 실시하는 검사도 못 믿겠다. 공장식 사육이 AI를 키우는 것 아닌가? 솔직히 맞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면 확실히 건강하다. 농가도 다 안다. 우리도 동물복지 농장을 운영하고 싶다. 문제는 돈이다. 한 평(3.3㎡)당 100마리 키우던 걸 50마리로 줄이려면 계열회사가 사육비를 두 배로 줘야 한다. 그럼 닭고기 값도 크게 뛸 텐데, 그게 가능하겠나. 농가 평균 소득이 1억원 이상이라던데? 평균일 뿐이다. 육계로 연간 1억원 이상 벌려면 10만 마리는 길러야 할 거다. 대졸자 평균 연봉쯤 받는 이들이 숫자로 보면 더 많을 거다. 더욱이 계사 한 동당 몇천만원씩 은행 빚을 지고 있다. 내 돈 몇억원 투자해서 1년 내내 닭똥밭에서 구른 대가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요즘처럼 AI가 심각하게 터지면 우린 1년의 절반을 실업자로 지낸다.
최악의 AI 사태를 맞아 정부가 최근 칼을 빼들었다. 하림 등 닭고기 계열회사에 방역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계열회사들은 그동안 사실상 농가에 방역 책임을 떠넘기면서도 자신들은 사료비 명목 등으로 살처분 보상금을 나눠 가졌다. AI가 터져도 계열회사는 크게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김현권 의원(더불어민주당)은 한 발짝 더 나아간 주장을 내놓는다. 네덜란드처럼 계열회사가 일정한 방역분담금을 내고, 그 초과비용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계열회사가 닭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만큼 방역과 피해 보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양계 농가는 반신반의한다. 원론적으로 찬성하면서도 계열회사가 방역 책임을 순순히 지겠느냐며 염려한다. 정원영씨는 “결국 어떻게든 농가에 부담을 전가할 것이라고 본다. 농가 처지에서는 억울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림 등이 참여하고 있는 육계협회 관계자는 “방역 책임 기금을 조성하는 데에는 원론적으로 찬성하지만, 그 기금의 운용 주체가 정부와 지자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라고 밝혔다.최근 농가에는 폭탄 하나가 더 터졌다. 농식품부가 3월8일 양계 농가에도 일정한 비율로 ‘가축방역세’를 물리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살처분 보상금, 소득안정자금, 매몰 비용 등으로 정부 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수혜자 부담 원칙’에 따라 정부 재원 일부를 농가가 부담하라는 것이다. 농가들은 이런 식이면 앞으로 ‘태풍세’ ‘지진세’라도 걷겠다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AI 사태로 불난 집에 정부가 기름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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