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10일 오전 11시21분 사무실 안팎에서 “와!” 함성이 솟구쳤다. 만에 하나를 걱정하던 나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뛸 듯한 기쁨은 없었다. “이제부터 정말 시작”이라는 다짐도, 어쩌면 내 스스로를 윽박지르는 것뿐이라는 예단 때문이었을까? 아니, 내 우울은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다.
지난해 11월이 되면서 나는 2004년 촛불 얘기를 꺼냈다. 나이 지긋한 분이라면 누구나 1987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얘기를 한다. 물론 5월에 접어들면 접전 양상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2007년 대선보다 훨씬 큰 차이로 야권 후보가 이길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2004년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가 기각된 날, 그가 차에서 내려 청와대 본관으로 걸어 들어오던 그 장면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동북아 비서관’이었다. “이제 개혁 한번 해보재이!” 지금도 쟁쟁한 그 목소리.
대통령 인기는 치솟았고 국회도 여대야소였으니 개혁의 적기였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뒤 대통령은 느닷없이 대연정을 들고 나와 좌절한 뒤, 그해 가을 한·미 FTA를 결심했다. 재벌, 관료, 보수 언론이 모두 찬성할 만한 ‘신자유주의 대개혁’이라고나 할까?
2005년 경주 공동선언과 그해 9월19일의 베이징 공동성명으로 한껏 고조됐던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는, 참여정부가 미국의 대중국 군사적 포위망(전략적 유연성)과 경제적 포위망(한·미 FTA)에 전격 합류함으로써 산산조각이 났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진행된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로 ‘무능하다’고 찍힌 민주파는 정권을 잃었고 뒤이은 9년여의 보수파 집권 결과는 참담, 또 참담하다.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때 평화통일도 가능한 게 아닌가, 꿈을 꾼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동북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래도 4~5%를 유지하던 성장률은 올해 2%에 턱걸이하기도 힘들다. 중국은 사드 배치 때문에 경제 보복을 하고, 미국은 한국의 무역흑자를 빌미로 경제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 경제 위기와 안보 위기가 겹쳤고, 그 강도는 현대사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또다시 촛불이 “이제 개혁 한번 해보재이” 상황을 만들었지만 유력 대선 후보들은, 심지어 진보 후보까지도 모든 문제의 원인인 사드를 입에 올리려 하지 않고 트럼프의 압력에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대개혁’을 촉발한 인사를 캠프에 영입하고 내친김에 박근혜의 ‘줄푸세’ 창안자와 악수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한 비전도 배포도 없는 분들이 오로지 촛불의 힘에 기대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입으로는 개혁을 외치지만 참여정부가 그랬듯이 좌절과 좌절을 거듭하면, 기득권이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한 후보는 아예 처음부터 재벌과 관료, 보수 언론이 제시하는 길로 가겠다고 선언한 마당이다.
11년 전보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훨씬 더 절실해졌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현실화된 지금, ‘동북아 균형자’는 더욱 절실하다. 아니, 이제 미국과 중국에 동시 압력을 받는 모든 나라가 ‘동아시아 균형 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당장 트럼프의 환율 압력에 대해서도 동아시아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외교안보 쪽에서도 동아시아에서 맞붙고 있는 미·중 군사대결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공동대응, 궁극적으로 안보 공동체가 절실하다. 미국의 동북아 개입에 빌미를 계속 제공하는 북핵 문제 역시 동아시아가 힘을 모아야 할 일이다.
좌절과 좌절을 거듭하면, 기득권이 원하는 길로 간다
때마침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중단해 배 위에 둘둘 말린 그물 꼴이 되었으니 한동안 경제적 포위망을 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드 배치가 대중국 군사적 포위망의 신호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실 사드에 관한 협상의 여지는 넓고 그 결과로 우리가 얻을 것도 무궁무진하다. 이미 현실이 된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들고 나오는 건 국제정치의 기초도 모르는 바보의 헛소리이고, 더구나 한·미 동맹 운운하는 건 얼마나 역사적 지각이 없는지 증명할 뿐이다.
2004년 촛불의 교훈은 ‘개혁적’ 대통령이라도 힘들고 지치면 오히려 개혁 대상의 편을 들 수 있고, 그 후유증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고통스러운 원인과 대책을 끝없이 광장에서 소리쳐야 한다. 그럴 때만 어리숙한 지도자도 역사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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