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으며 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만큼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성숙했다. 비슈케크 거리에서 출근을 하던 전기 기술자 유슈프 씨(37)는 “튤립혁명으로 나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것에 신께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중앙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장기집권 독재국가이다. 대통령이 선거에 의해 바뀐 적이 거의 없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27년째, 타지키스탄의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은 20년째 집권하다 최근 아예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시사IN〉 제495호 ‘턱수염을 밀어버린 중앙아시아의 독재자’ 기사 참조). 독재는 대통령이 죽어야 끝날까 말까다. 우즈베키스탄은 2016년 9월3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사망하며 25년간의 1인 독재에서 벗어났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06년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숨진 뒤에야 종신 대통령제를 청산했다.
키르기스스탄만이 유일하게 선거로 대통령을 바꾸었다. 그 발단은 2005년 총선이었다. 국민은 이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아카예프 독재 정부가 부정을 주도했다고 믿었다. 아카예프의 비리와 부패에 넌더리가 난 야권과 시민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튤립혁명’ 혹은 시위대가 변화를 상징하는 레몬을 들고 다녔다 해서 ‘레몬혁명’으로 불린 이 총궐기로 아카예프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야당 대표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같은 해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혁명은 성공했다. 처음으로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결정했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다른 인근 국가들처럼 독재가 비운 자리를 다시 독재가 채웠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다. 하지만 서서히 언론과 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키르기스스탄 국민은 실망했다. 거기다 공공요금과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르는 등 정부가 경제정책에 난맥상을 보이자 국민의 불만은 다시 커졌다. 키르기스스탄의 한 언론인은 “국민은 배신감을 느꼈다. 혁명은 국민이 했는데 바키예프 대통령은 그 열매만 따먹으려 했다. 이미 한번 대통령을 바꿨던 국민은 다시 바꾸고 싶어 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2차 튤립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때는 불행하게도 피를 흘렸다.
2010년 4월, 수도 비슈케크에 반정부 시위대 3000~5000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통령 청사로 행진했고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사하며 진압에 나섰다. 키르기스스탄 보건부는 이때 47명이 사망하고 4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야당은 최소 100여 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소형 비행기를 타고 수행원들과 수도 비슈케크를 탈출해 고향인 남부 도시 오시로 향했다. 야권은 의회를 해산하고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새로운 과도정부 수반은 로자 오툰바예바 사회민주당(SDP) 대표였다. 그녀는 바키예프와 함께 1차 튤립혁명을 이끈 영웅이었다. 그녀는 기자회견장에 항상 노란색 튤립 모양의 브로치를 꽂고 나와 자신이 혁명의 중심에 있음을 과시했다. 바키예프는 수도를 비운 지 열흘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두 자녀만 데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도망쳤다.
가난의 굴레에서 IS를 선택하는 젊은이들
2차 튤립혁명이 유혈로 얼룩지자 키르기스스탄 국민은 실망이 컸다. 키르기스스탄은 과도정부 아래서 국민투표로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사실상 내각책임제로 전환한 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신설했다. 2차 튤립혁명 때 친구를 잃은 아이다나 씨(29)는 “우리는 부모 세대와 다르다. 부모들은 소련 치하에서 권력에 굴복하는 것을 배웠지만 우리는 저항을 익혔다. 비록 2차 튤립혁명 때 내 친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도 민주주의는 성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3월10일 한국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평화로운 촛불집회로 인해 성공하자 키르기스스탄에서 프리랜서로 경제 분야를 취재하는 안드레이 기자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축하한다는 인사와 더불어 “촛불을 든 한국인이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때의 우리 국민처럼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마나스는 누구예요?”라고 물었다. 마나스는 키르기스스탄 전설에 나오는 영웅이다. 이 나라 곳곳에 말을 탄 동상이 서 있을 만큼 유명하다. 수도 비슈케크의 국제공항 이름도 마나스이다.
2011년 대선에서 당선한 ‘마나스’가 현재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이다. 그 또한 2005년 튤립혁명 당시 시위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2010년 2차 튤립혁명 때 바키예프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도 주도적 구실을 했다. 친러시아 성향 온건파인 아탐바예프는 북부뿐 아니라 민족 간 유혈 충돌이 벌어진 남부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어서 오툰바예바로부터 평화적으로 권력을 물려받았다. 키르기스스탄의 정치평론가인 우란 체키르바예프는 “그는 권력을 위임할 줄 아는 민주주의자다”라며 극찬했다.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국과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적임자로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아탐바예프 대통령도 경제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이다. 키르기스스탄은 국토 전체의 40%가 해발 3000m 넘는 산간 지대이다. 절대적으로 농지가 부족하고 이렇다 할 제조업도 발달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의 전체 GDP는 9억3240만 달러로 세계 134위이다. 한 집에 한 명씩은 러시아로 날품팔이 노동을 하러 떠났다. 중간급 공무원 월급이 200달러를 밑돈다. 남부 도시 오시의 국립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미샤 씨(34)는 “내 월급 300달러 정도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먹이는 데도 부족하다. 물가가 살인적이다. 그래서 퇴근 후 집에서 아내와 수공업 장식품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두 명을 권좌에서 끌어내고 두 차례 혁명에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가난이 국민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탐바예프 대통령은 취임 6년이 다 되도록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최근 SNS에 자신을 욕하는 글을 올린 20대 젊은이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언론에 대한 간섭도 심해졌다. 최근 아탐바예프 대통령은 이슬람국가(IS)의 자국민 포섭 공작 때문에 골치가 더욱 아프다. 2015년 키르기스스탄 주재 중국 대사관에 100㎏이 넘는 폭약을 싣고 돌진한 자살폭탄차량 테러 사건이 터졌다. 연초의 터키 이스탄불 나이트클럽 테러 사건의 범인도 키르기스스탄 사람이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인 500여 명이 IS 대원이 되려고 시리아로 향했고, 약 2000명이 IS의 급진 사상에 물든 것으로 추정된다. 가난의 굴레에서 이슬람 급진주의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이 귀국을 시작한 지난해부터 아탐바예프 정부는 힘든 숙제를 또 하나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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