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주류 언론의 비판적 사실 보도들을 ‘가짜 뉴스(fake news)’로 몰아붙이며 선동을 일삼아왔다. 최근에는 각종 음모론을 밑도 끝도 없이 제기하는 것으로 정치 전략을 바꾼 듯하다. 급기야 트럼프는 지난 미국 대선 막바지인 2016년 10월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나에 대한 도청을 지시했다’며 음모론을 펼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요즘 미국 사회가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 때문에 난장판이다. 미국에서 음모론이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제2의 총격범이 있다’ 혹은 ‘9·11 테러는 부시 행정부의 소행’이라는 등 음모론이 유포되어왔다. 최근 음모론은 그 발원지가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음모론으로 재미를 보았다. 대선 출사표를 던진 직후 아무 근거도 없이 “멕시코의 살인범과 강간범이 미국에 들어오고 있다”라며 이목을 끌었다. 방송에 나가 “오바마가 이슬람국가(IS)의 창시자다”라고 떠들어댔다. 같은 당 대선 후보인 테드 크루즈의 부친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유세 때는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뇌에 문제가 있다고 외쳤다. 대선 투표일 직전에는 “부정직한 민주당 유권자들이 이번 대선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준동하고 있다”라며 대선 음모론을 펼쳤다. 물론 트럼프가 음모론과 함께 구체적 증거를 제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AFP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건강보험 개혁이 망하도록 고안했다’라고 말했다.
“언론과 CIA가 함께 음모를 꾸몄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음모론을 계속 제기해왔다. 특히 트럼프 측 인사들이 러시아 측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설’이 신빙성을 더해가자, 그의 음모론은 더욱 거세졌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을 단정한 중앙정보국(CIA)을 지목하면서 “정보기관이 가짜 뉴스를 흘려선 안 된다. 우리가 지금 나치 독일에 살고 있는가?”라고 질타했다. CIA의 수사 자체를 음모로 간주한 것이다. 마이클 플린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와 부적절한 접촉을 지속해온 사실이 폭로되어 사임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플린의 잘못된 행위에는 일언반구 없이 “언론과 CIA가 함께 음모를 꾸몄다”라고 몰아붙였다. 트럼프는 대선 시절 자신과 러시아 간 커넥션 의혹을 조사한 국가안보국(NSA)과 연방수사국(FBI)에 대해서도 “국내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라며 두 기관의 활동을 음모론 시각에서 파악했다.

급기야 트럼프는 3월4일 트위터를 통해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바마 전 대통령을 음모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그날 새벽 트럼프는 “오바마가 (지난 대선) 승리 직전 트럼프타워에서 내 전화를 도청했다는 걸 방금 알았다”라는 트윗을 날렸다. “오바마는 나쁜 사람”이라며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비슷한 ‘오바마의 트럼프 도청 사건’을 초당적으로 조사하라고 미국 의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3월10일 공화당 지도부를 만나 ‘오바마가 자기 임기가 끝나자마자 건강보험개혁법, 일명 오바마케어가 망하도록 고안했다’는 식의 황당한 음모론을 꺼냈다.

폴 머스그레이브 매사추세츠 대학 교수는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두 달도 안 된 상황에서 사고방식의 축으로 음모론을 채택해버렸다. 거짓이 사실처럼 퍼져나가다 보면 결국 사실 그 자체가 훼손되어 민주주의의 기반인 사회계약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AFP3월4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 등 주요 도시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의 행진이 이어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음모론과 관련해서 특히 주목해야 할 새로운 유행어가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과 보수 매체들이 최근 부쩍 제기하고 있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란 용어다. 직역하면 ‘깊숙한 국가’라는 뜻인데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미국 정치사상 최대 스캔들로 꼽히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익명 제보자가 30년 이상 ‘딥 스로트(Deep Throat)’로 불렸던 걸 상기하면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익명 제보자는 닉슨 행정부 시절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을 지낸 마크 펠트였다. 당시 사건을 파헤친 〈워싱턴 포스트〉 밥 우드워드 기자는 사건이 터진 1972년 5월 이후 2005년 5월31일(펠트 스스로 기사의 취재원임을 고백한 날)까지 펠트를 ‘깊숙한 목구멍’, 즉 ‘딥 스로트’로 지칭했다. 딥 스로트인 펠트는 닉슨 행정부 내의 반닉슨 인사였다. 이 용어를 살짝 변형한 딥 스테이트는 ‘집권세력 내부의 반정부 저항세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와 트럼프가 딥 스테이트에 관해 장시간 논의했다”라고 보도했다. 행정부 내부의 딥 스테이트들이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딥 스테이트라는 용어가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계기는 지난 2월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의 사퇴였다. 사퇴의 원인인 플린과 러시아 측의 접촉을 파악한 주체가 CIA였기 때문이다. 〈뉴요커〉 데이비드 렘닉 주간은 최근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트럼프 열렬 지지자들은 딥 스테이트에 대해, 은밀히 트럼프 대통령을 깎아내리고 국정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정보 당국, 군부, 월스트리트, 실리콘밸리, 연방기관 관료 집단 등의 복합체로 간주한다.” 트럼프 지지자들 일각에서는 오바마 전 대통령을 딥 스테이트의 사령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허영심에 불타는 대통령 자신”

극우 매체들이 딥 스테이트를 유행어로 만들고 있다.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가 한때 회장으로 있던 극우 온라인 매체 〈브라이트바트 뉴스〉는 플린의 사퇴를 “딥 스테이트의 위대한 첫 작품”이라고 규정했다. 이 매체의 조엘 폴록 편집위원은 극우 성향인 〈마크 레빈 쇼〉에 출연해 “(트럼프를 무너뜨리기 위한) 조용한 쿠데타가 벌어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극우 성향 방송인 러시 림보는 최근 라디오 쇼에서, 트럼프 측 인사들과 러시아 측의 접촉에 대한 〈뉴욕 타임스〉 단독 보도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 내 딥 스테이트 취재원에 근거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방송 홈페이지에는 ‘버락 오바마와 그의 딥 스테이트 공작원들이 정당하게 당선된 미국 대통령을 파괴하기 위해 획책 중’이라는 내용의 긴 글을 올렸다.

이처럼 주로 우파 매체와 언론인이 제기하는 딥 스테이트에 대해 미국 내 전반적 여론은 부정적이다. 먼저 딥 스테이트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가 논란거리다. 행정부 교체에 상관없이 정부의 영속성을 위해 존재하는 기존 관료 조직을 딥 스테이트라 통칭한다면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의 주장에 나오는 ‘행정부 내의 반정부 음모 조직’ 따위는 상상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 분석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샤디 하미드 박사는 최근 월간 〈애틀랜틱〉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대통령이 너무도 무모한 행동을 거듭해서 국가기관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라며 트럼프를 비판했다. 〈뉴요커〉 주간 렘닉도 “결국 워싱턴의 문제는 딥 스테이트가 아니라 신의 없고 허영심과 복수심에 불타며, 놀랄 정도로 변덕스러운 대통령 자신이다”라고 꼬집었다. 특히 〈워싱턴 포스트〉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트럼프에 대해 “사람들을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충성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불충스러운 끔찍한 적으로 나누려는 그의 성향은 견제와 균형, 심리 및 토론에 근거해 움직이는 민주적 시스템에 비추어볼 때 아주 건강치 못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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