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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자청한 결정장애 통치자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준비가 안 된 통치자였다. 기괴한 수도승의 전횡에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수천명이 압사당하는 사고에도 무도회를 멈추지 않았다. 1917년 3월15일 그는 퇴위 선언을 해야 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22일 수요일 제4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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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러시아의 차르(황제의 러시아식 표현) 알렉산드르 3세가 죽었어.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정치를 거꾸로 돌리고 공포정치를 폈던 전제군주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어 지구상 육지의 6분의 1을 차지한 러시아 제국을 다스릴 새로운 차르는 니콜라이 2세였어.

이때 니콜라이 2세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 알렉산드르 3세는 아들이 서른 살을 넘어서면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을 시킬 계획이었다고 해. 즉 니콜라이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제위를 이어받게 된 거야. 본인 스스로도 이렇게 얘기했다지. “나와 러시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난 차르가 될 준비가 안 되었고 되고 싶지도 않아. 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ITAR-TASS
러시아 정치에 개입한 수도승 라스푸틴.
니콜라이 2세는 관대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어. 1891년 황태자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를 호위하던 일본 경찰관이 칼을 휘둘러 큰 상처를 입는 일(오쓰 사건이라고 한다)이 벌어졌지만 일본의 사과를 너그러이 받아들인 적도 있지. 머리도 좋아서 영어·독일어·프랑스어를 능숙하게 했고 영어의 경우는 영국인들이 토박이로 착각할 만큼 유창했다고 해. 하지만 그에게는 한 국가의 통치자로서 결정적인 흠이 있었어. 바로 결단력 부족이었지. 요즘 말로 하면 ‘결정장애’라고나 할까. 귀는 얇아서 이 말 저 말에 다 휘둘리지만 정작 결단하고 일어서야 할 때는 엉덩이가 무거운 스타일.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부담을 지기보다는 본인이 신뢰하는 사람의 뜻에 따르는 편리함을 선택하는 쪽이었지. 이런 니콜라이가 차르로서 러시아에 처음 내린 포고는 천만뜻밖이야.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만큼 단호하고 확고한 전제정치를 유지할 것임을 모든 신민에게 알리라.” 결정장애가 있는 준비 안 된 통치자가 ‘독재’를 선언한 거야.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돼. 거의 모든 유럽 왕족들이 총출동할 만큼(조선의 민영환도 참석했다) 으리으리했어. 대관식에는 일반 백성에게도 차르의 선물을 내리는 것이 러시아의 전통이었고, 차르의 선물을 기대한 백성들이 지정된 옥외 장소에 모여들었는데 그만 서로 밀치고 넘어지는 가운데 1000명 넘게 밟혀 죽는 대형 참사가 일어나. 이 참사 소식은 무도회를 앞두고 있던 황제와 황후에게 전달돼. 누가 봐도 무도회를 중단할 상황이었지만 차르는 무도회를 계속해야 한다는 황후의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황후에게 손을 내민단다. 둘은 우아하게 춤을 추었지. ‘아버지 차르’의 선물을 받고자 모여든 러시아 백성 1000여 명이 내지른 비명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말이야. 외국 대사들조차 “미쳤다”고 말할 만큼 눈치 없는 짓이었지.

무능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집안에서는 독재자인 경우가 많아. 러시아의 ‘아버지 차르’(러시아 국민들은 니콜라이 2세를 그렇게 불렀다)는 알렉산드르 3세가 무색할 정도로 전제정치를 자행했단다. 언론을 검열하고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러일전쟁 같은 소모전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지. 대표적으로는 1905년 1월22일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들 수 있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러시아 인민들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를 들고 국가(國歌)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부르며 ‘청원’하기 위해 궁전으로 행진해왔을 때 군대는 가차 없는 총격을 가하고 기병대 돌격까지 감행해 수백명을 죽여버린단다.

ⓒ연합뉴스
3월1일 서울 세종로사거리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우유부단한 전제군주 황제의 배후에 또 한 사람 기괴한 인물이 등장한다. 라스푸틴이라는 시베리아 출신 수도승이야. 그는 혈우병에 걸린 니콜라이 2세 아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기묘한 ‘치료술’을 발휘하면서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고 황후 뜻대로 움직이던 황제를 조종할 수 있게 됐어. 그는 거침없이 정치에 개입했고 관리들과 군인들의 자리 갈아치우기를 식은 죽 먹듯 했지. 이를 보다 못한 수상 스톨리핀이 라스푸틴을 경계하라고 호소하는데 이때 니콜라이 2세는 이렇게 말했어.

“아마도 경이 한 말은 모두 진실일 것이오. 그러나 라스푸틴에 관해서는 다시는 나에게 말하지 말 것을 부탁해야겠소. 여하간 나는 그것에 관해서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소.” 아마 스톨리핀은 물러나와 통곡했을 것 같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이전 수상 비테의 말을 기억하면서 말이지. “차르가 불쌍하고 러시아도 불쌍하다. 무엇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어떤 유산을 남기게 될 것인가(<보석 천 개의 유혹> 에이자 레이든 지음, 다른출판사 펴냄).”

니콜라이 2세의 최대 헛발질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1915년 인기 높은 군인이자 아버지의 사촌인 니콜라이 대공을 제치고 본인이 직접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돼 전선으로 달려간 일일 거야. 당연히 러시아군은 참패를 거듭했지. 그 지경에서도 황후는 ‘우리 친구’, 즉 라스푸틴의 조언을 계속 보내고 있었어. “폐하, 우리 친구가 밤에 계시를 받았는데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해야 한답니다.” 불만에 그득한 러시아 군인과 노동자·농민들이 봉기하고 수도가 마비됐을 때 두마(러시아 의회) 의장 루드지앙코가 황제에게 급보를 보내자 황제는 이렇게 답할 만큼 현실감각이 마비돼 있었어. “뚱보 녀석이 엉뚱한 전보를 보냈어. 답신할 필요도 없다.” 그 며칠 후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퇴위 선언을 해야 했고, 공산 세력의 포로가 됐다가 이듬해 가족과 함께 총살당하고 만단다.

대관식 날 백성 수천명이 죽고 다쳤는데도 무도회를 강행하고 황후와 함께 왈츠를 신나게 추던 철없는 황제. 현실감각이 마비된 채 황후와 라스푸틴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던 대국 러시아의 못난 황제. 웅장한 군대의 사열을 즐겼고 스스로 수백만 대군의 총사령관을 자임했지만 결정 하나 내리기 힘들어서 황후의 전보에 목을 맸던 어처구니없는 황제가 퇴위한 건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1917년 3월15일의 일이었어.

그로부터 100년 후 ‘선거의 여왕’ 퇴장

그로부터 100년 뒤의 3월 아빠는 마치 니콜라이 2세가 환생한 듯한 인물의 퇴장을 목격하고 있다. 한때 누군가에게 칼을 맞고도 선거를 걱정하는 ‘강단’을 보여주고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금 같고 옥 같은 아이들이 바다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던 평일 오전,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쉬고’ 있었고, 그 지경에서도 ‘머리’를 했던 황망한 통치자, 최순실이 국사(國事)를 돌보느라 밤잠을 설치는 동안 “선생님 연락 안 왔나요?”를 되뇌며 조급해하던 어이상실의 대통령, 최순실에게 밉보인 공무원을 이름까지 거명하며 “나쁜 사람들”로 몰아 끝내 찍어내던 개념 없는 행정부 수반, 천만에 가까운 국민들이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며 주말을 반납하고 몰려나온 상황에서도 “태극기 집회 참여자가 촛불시위보다 두 배도 넘을 정도로 정말 열성을 갖고 많은 분들이 참여하신다고 듣고 있는데, 그분들이 왜 저렇게 눈도 날리고 날씨도 추운데 계속 많이 나오시게 됐나…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심정이다”라고 하는 현실감각 제로의 국가원수를 니콜라이 2세가 본다면 아마 이렇게 소리 지를 것 같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었지 않은가.” 그러다가 ‘성조기 시위대’를 보면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까. “나는 죽은 뒤에야 성인(聖人:러시아정교회는 공산 정권 몰락 뒤 니콜라이 2세를 시성(諡聖), 즉 성인으로 기렸다)이 됐는데 여기 이 사람은 살아서도 천사가 됐군. 나보다 위인걸.”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우리 대통령님은 하늘의 천사이십니다”라고 적힌 성조기 집회 참여자의 피켓이 솟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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