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런던동물원은 특별한 야간 개장 이벤트를 준비한다. 호랑이 구역 근처 넓은 평원에 작은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제를 여는데, 관람객들은 모두 ‘호랑이가 놀라지 않도록’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해야 한다. 노을이 지고 나면 〈라이프 오브 파이〉나 〈라이온 킹〉 〈쥬만지〉 등 영화 상영이 시작된다. 만만치 않은 티켓 값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많은 관람객들이 이 조용한 영화제를 찾는다고 한다. 낭만과 설렘이 가득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법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시계를 조금 앞으로 감아보면 어떨까. 〈동물원 기행〉의 저자 나디아 허는 이 책에서 런던동물원의 오래된 장면들을 소환하여 함께 보여준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강국들이 제국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세계 각지를 정신없이 ‘싹쓸이’하던 시대, 귀족과 탐험가들은 아시아·아프리카의 ‘희귀동물’ 수집에 열을 올렸다. 런던동물원의 동물들 또한 영국 제국주의의 확장과 발맞춰 늘어났다. ‘약탈의 산물’로 출발했지만 이후 동물원과 런던동물학회는 부단한 연구로 걸출한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이제는 자연 상태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수많은 생물 종을 지키는 보루이자 의미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서도 기능한다. 런던을 비롯해 파리·베를린·로마·상하이·하얼빈 등 세계의 역사 도시들로 떠난 이 ‘동물원 답사기’는 동물원을 무대로 펼쳐진 침략과 약탈, 전쟁과 냉전, 폭력과 야만, 그리고 더딘 진보의 역사를 응시한 기록이다.

록밴드 U2의 앨범 표지에 실린 분홍 돼지 ‘앨지(Algie)’에 관한 에피소드나 ‘개 같은 사랑(225쪽)’ ‘라이언 고슬링의 캥거루 같은 매력(229쪽)’ 같은 거침없는 꼭지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무겁고 쓸쓸하고 괴로운 책으로 남았으리라. 다행히도 저자는 동물원을 거쳐간 수많은 동물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부터 동물원을 담은 음악과 영화, 문학작품들을 끊임없이 소환하며 다채로운 이야기의 변주를 보여준다. “중요한 건 언제나 깨어 있는 것, 격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고하는 것, 싸구려 동정과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동물원 기행〉
나디아 허 지음
남혜선 옮김
어크로스 펴냄

기자명 박민지 (도서출판 어크로스 편집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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