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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성평등 세상에 성소수자는 없나

김현 (시인)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17일 금요일 제4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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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쌍화탕을 먹고 산다는 글을 본 친구들이 ‘쌍화탕 전도사냐’며 휴대전화로 인사를 건네왔다(<시사IN> 제493호 ‘복잡하고도 연약한 남자를 생각하며’ 기사 참조). 그렇다면 한번 먹어보겠노라고 적극적인 의사를 밝혀온 이도 있어서 내심 뿌듯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웃 간에 좋은 게 좋은 정다운 이야기. 산다는 건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야기될 때 살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야기를 쓸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이야기를 쓰면 안 될 것 같다. 어떤 삶의 사태는 이야기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야기가 되기 전의 ‘사실’로만 존재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지난주 내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사람의 말’이 있었다. 씻다가도, 먹다가도, 자다가도 생각이 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 우리 삶 전체를 온전히 지배했다. ‘가만히 있으십시오’라는 말이 거짓된 청유가 아니라 진실한 명령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발목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말의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제, 가만히 있어라, 라는 말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감히 쓸 수 없는 말이 되었다. 말은 그렇게나 무서운 것이어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녀노소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혹시 누군가의 뚫린 입에서 버젓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목격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이의 삶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이가 무얼 먹고 무얼 싸며, 무얼 보지 않고 무얼 듣지 않고 살고자 하는지 그 인생을 돌아봐야 한다. 우리, 천만 시민은 그런 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배웠다.

ⓒ연합뉴스
2월16일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활동가들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항의하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지난 2월16일 유력 대선 후보 문재인씨는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7차 포럼’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선언했다. 그가 바로 직전 보수 기독교 단체를 방문하여 차별금지법에 사실상 반대한다고 말한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바로 성평등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문재인씨의 선언은 조금 더 코미디에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그날 현장을 녹화한 짤막한 영상을 보고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관해 질문하는 활동가들을 향해 “나중에 발언 기회를 드리겠다”라는 말을 내뱉는 문재인씨의 얼굴을 보기가 당혹스러웠고, 그에 반응해 “나중에”를 외치는 청중의 목소리는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포럼의 주제인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를 곱씹으면서는 화가 났다. 엄마(아들), 아내(남편), 딸(아버지)로 이어지는 이성애자 가족주의에 기반한 여성주의 선언의 한계를 모르는 건지, “사람이 먼저인 세상, 성평등한 세상”에 성소수자는 없다는 건지, 성평등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그가 말하는 성평등 세상은 양성평등 세상인 건지), “우리 사회 곳곳의 젠더 폭력”을 그 자신이 자행하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 건지(남성 육아휴직제가 얼마나 현실과 먼 얘기인지는 실제 노동자 아빠들의 원성으로 대신하겠다), “성평등과 인권 교육을 공교육에 포함시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확산을 막겠다”라는 게 차별금지법 제정의 이유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지 나부터도 그에게 묻고 싶었다. 대답을 들어야만 나의 선거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묻고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청중의 목소리였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내야 할지 까마득했다. 단순히 포럼 진행을 위한 정리 발언이었다면….

권리의 주장에 순번을 매길 수 있나

그러나 그때 그 사회의 ‘합의된’ 목소리에, 항의하던 활동가들과 현장에서 투쟁하며 관계 맺던 이도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기운이 쫙 빠졌다. 그들이 그즈음 광장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라고 외치던 천만 시민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날 그곳 활동가들의 외침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3년 전 봄에, 가만히 있다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의 외침이라는 걸, 그들이 ‘나중에 살라는 겁니까?’라고 생존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걸 그들이 알았다면.

혐오와 차별 반대를 교리의 뒤에 두고 평등을 합의의 산물로 전락시키고 권리의 주장에 순번을 매기는 일이 과연 ‘촛불혁명’으로 우리가 배운 것인가를 나는 이즈음 우리가 모두 함께 고민해보길 원한다. 그렇게 고심해야 진정한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고심해야 여성주의 선언이 여성으로 시작해 여성으로 끝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고심해야 언젠가 무서운 말의 족쇄를 풀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금, 묻고 싶다.

얼마 전 ‘생선과 살구’라는 시를 썼다. 그 시의 첫 연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의 말로 시작된다. ‘저는 여성이자 성소수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습니까?/ 반으로 갈라진 것을 보면/ 소금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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