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성이 울렸다. 강맑실 사계절 대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등 출판계 인사들이 “윤철호”를 연호했다. 229표 대 130표. 예상보다 훨씬 큰 차이였다. 회의장은 오랫동안 술렁였다. 백발이 성성한 출판계 어른들도 새로운 회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2월22일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정기총회에서 윤철호씨(사회평론 대표)가 3년 임기 새 회장으로 당선됐다. 이는 꽤 큰 ‘사건’이다. 학습·어린이·전집류 출판사들이 장악해온 출협의 수뇌부가 단행본 출판사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시사IN 조남진
출협은 올해 70주년을 맞은 전통 있는 출판단체다. 650여 개 출판사가 가입되어 있다. 연간 매출 규모가 수천억원대인 대형 출판사들이 포진해 있다. 교과서로 유명한 금성출판사 김낙준 회장, ‘Why?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예림당 나춘호 회장 등 출판계 거물들이 이 단체를 이끌어왔다.

윤철호 회장은 당선 직전까지 450여 개 단행본 출판사를 대표하는 한국출판인회의(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다. 지난해 이 단체 회장 신분으로 출협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출판계 안팎의 이목을 끌었고, 마침내 당선됐다. 출판인회의와 출협, 한국 출판을 대표하는 두 단체를 아우르는 인물이 탄생한 셈이다.

윤철호 회장은 독특한 스토리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1989년 서슬 퍼런 군사정권 때 노동운동으로 구속돼 “우리는 사회주의자다”라는 법정 최후진술을 남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노동운동의 연장선으로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을 창간하고, 출판사 사회평론을 차렸다. 경영 악화로 고생할 즈음인 1999년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성공한 출판 경영자로 발돋움했다.

당선되고 이튿날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협 사무실에서 윤철호 회장을 만났다. 1975년 건축된 출협 건물 회장실에는 ‘책은 만인의 것’이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휘호 아래서 일하게 될 줄 몰랐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리고 이내 정부의 출판 정책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상대 후보와 표 차이가 꽤 컸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출협 내 각 회원사들 관계가 몇십 년씩 된다. 내가 선거운동 몇 달 해서 당선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실제로 선거 과정에서 출협을 좌파 쪽에 넘겨줄 순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 걸로 안다. 결국 좌·우파를 떠나서 출판을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결과라고 본다. 따져보니 기존 출협 성향 회원사 쪽에서도 100표 정도 내게 온 걸로 보인다.

출판계 통합을 강조했다. 출판계가 갈라져 있다는 이야기인가?

크게 보면 출협과 출판인회의로 갈려 있는데, 사안마다 이견이 있다. 단행본 따로, 학습출판 따로, 과학출판 따로 조직이 꾸려져 있다. 이를테면 EBS가 학습교재를 독점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학습교재 출판사가 많은 출협 쪽에서는 중요한 이슈인데, 출판인회의는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독서진흥 운동은 단행본 쪽만 나서는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정부·시민사회·정치권에 우리 의견을 통일해서 전달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게 절실하다.

ⓒ한국출판인회의2016년 2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제2대 원장에 낙하산 인사가 내정되면서 윤철호 회장(가운데) 등 한국출판인회의 소속 회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게 그토록 중요한가?

지금 이런 문제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어용 세력을 육성하고 있다. 문체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출판진흥원)에서 민간 활동에 빨대를 꽂았다. 예컨대 출판인회의가 운영하는 서울북인스티튜트라는 출판계 최고의 교육기관이 있다. 그런데 출판진흥원에서 출판아카데미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기존 출판인회의의 사업을 침해하고 있다. 출협 쪽에도 마찬가지다. 출협에서 22회째 주최해오고 있는 서울국제도서전을 가져가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잘되는 사업은 다 챙기겠다는 것이다. 최근엔 독서진흥본부까지 만들었다. 조만간 직원 몇 명 뽑아서 각 출판사에 팩스를 보낼 거다. 몇백만원씩 지원할 테니까 줄 서라고. 민간 독서운동을 없애겠다는 식이다. 관이 민간 돈으로 민간 출판을 죽이려 한다.

출판진흥원이 왜 그런 일을 벌일까?

결국 자기들 놀이터를 만들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출판아카데미나 서울도서전은 매력적인 놀이터다. 자기들 말 잘 듣는 세력을 키워서 우리 목소리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관련 정책자금을 노리는 중소 출판업체, 논문 지원을 기대하는 교수들이 지금 출판진흥원에 발이 닳도록 드나든다. 이들이 나중에 그런 어용 세력이 될 게 뻔하다.

2012년 출판진흥원 설립을 논의할 때 출판인회의도 함께 참여하지 않았나?

출판진흥원 인력 대다수가 원래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왔다. 처음부터 이들에게 출판 진흥 능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논의 과정에서 공무원의 선의를 믿었다. 잘 해보겠다더라. 그런데 설립되자마자 출판계와 거의 무관한 인물을 낙하산 인사로 내려보내며 뒤통수를 쳤다. 충격을 받았다. 정말 공무원은 양심이 없구나 싶었다. 그 당시 낙하산 원장에 반대하는 시위를 7개월 이상 벌였다.

올해 초 출판진흥원 이사 선임 때 청와대와 국정원이 사상 검증을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블랙리스트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들어보니 출판계 전체에 진흥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더라. 뜻밖에 출협 쪽 어른들도 그런 말을 하시더라. 나도 개인적으로는 출판진흥원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출판계·정치권 등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협의하겠다.

ⓒ연합뉴스1월12일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한국작가회의가 정부의 출판계 블랙리스트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협과 출판인회의를 통합하겠다고 밝혔다. 빅이슈인데, 실제로 추진하나?

문제의식을 통일하는 게 먼저다. 우선 서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번 선거도 그 과정 중 하나다. 지금 출판인회의의 기능이 과도하게 커진 측면도 있다. (정책 관련해서) 출협의 기능이 강화되는 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의견이 모이면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볼 것이다.

송인서적 부도 사태는 어떻게 해결하나?  

출판인회의에서 실사 중이다. 송인서적 채권단이 판단할 수 있게 여러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채권단에서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공적 자금 투입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려면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마저도 안 되면 청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부도 그 자체가 아니다. 차제에 도서판매정보 시스템 등 전반적인 출판 선진화를 꾀하는 게 더 중요하다.

공교롭게도 송인서적 부도 이후 문체부에서 출판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의미 없다. 과거에도 5개년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제로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이것저것 다 섞어놓았지만 실행률이 20%나 될지 모르겠다. 지금 정부에게는 출판 진흥책이 없다. 오히려 출판 해체론에 가깝다. 출판을 낡은 것이고 디지털 분야로 편제되어야 하는 산업으로 인식한다. 이게 2000년 전후 IT 열풍이 불면서 세운 ‘디지털 온리(only)’ 전략이다. 여기서 변한 게 없다. 그 결과 온라인 서점 규모만 커졌고, 서점과 출판계는 위축됐다. 가끔 앓는 소리를 하면 닭 모이 주듯 관리용 예산이나 좀 던져주는 게 전부였다.

출판계는 왜 목소리를 내지 못했나?

내 책 잘 만들고, 좋은 필자 만나는 것만 중요하게 여겼지, 큰 틀에서 의견을 낼 여력이 없었다. 돈과 여력이 있는 데가 참고서·학습서 만드는 곳인데 이 사람들은 주로 교육부를 상대한다. 그들은 몇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정부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면 손해라는 걸 잘 안다. 그러니까 단행본 출판사가 나선 건데, 이들은 여력이 없다. 아까 말했듯 문체부도 큰 문제였다. 출판 정책을 놓고 우리랑 토론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임기 중에 꼭 추진하고 싶은 사업은?

출판진흥기금 1조원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현재 출판시장 규모가 연간 4조원이 넘는다. 이 중에서 1%만 기금으로 적립해도 1년에 400억원이다. 가능하면 정부 돈을 빌리지 않고 출판인 스스로 조성하려 한다. 이 기금이 우리 출판계의 중요한 자립 기반이 될 것이다. 출판계의 독자적인 정책 연구기관 설립도 필요하다.

출판은 사실 사양산업 아닌가?

종이책만 보면 사양산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출판의 외연을 보라. 웹콘텐츠, 게임 등 뻗어나갈 곳이 많다. 예를 들어 만화 출판사인 대원씨아이가 게임산업에도 진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정부가 기존 출판계는 종이책에 주력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파피루스를 만들던 이들에게 너희는 파피루스만 만들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인터넷 강의 등으로 웹콘텐츠 매출이 이미 100억원이 넘는 출판사도 있다. 민음사도 이미 웹소설 분야에 진출해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종이책 따로, 웹소설 따로, 게임 따로 관리하려 든다.

앞으로 출협이 정부와 이런저런 각을 세울 수밖에 없겠다.

이미 관련 공무원들이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린다(웃음).

출협 회장 일에 매진하느라 출판사 경영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가?

출판계 사람들은 이런 자리 맡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인회의 집행부를 꾸릴 때 출판사 대표들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고 공부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나중에 매출이 오를 거다’라고 말했다. 사기를 친 건데, 나중에 보니 다들 매출이 올랐더라. 결과적으로 사기가 아니었다(웃음). 출협 회장을 하면서도 그렇게 해보려 한다. 정책 자금 같은 걸 받지 않고도 출협과 회사 모두 잘되게 하는 게 목표다. 나 스스로 좋은 선례가 되어야 출판계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맡으려 할 것 아닌가.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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