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해준 아저씨가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소년을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 차근차근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준 뒤였다. 난생처음 제 힘으로 파도를 가른 짜릿함에 들떠 해변에 앉아 있는데, 아저씨의 낮고 믿음직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산들산들 소년의 귀에 닿았다. ‘세상 어딜 가도 흑인이 있다’는 그 말. 이상하게 듣기 좋았다. 아저씨가 계속 얘기했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뭔가 중요한 이야기 같아 가슴에 담아둔 소년.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아저씨 목소리. 그날 그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마냥 듣기 좋을 따름이었다.
아저씨를 처음 만나던 날, 어둠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웅크린 소년이었다. 못된 또래 패거리가 문 두드리는 소리와 돌 던지는 소리를 피해 숨은 건물이 마침 아저씨 소유였다. 어둠 속에서 소년을 꺼내주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바다에 데려가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저 귀를 열고 그다음 마음을 열고 스스로 미래를 열어가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날 그 바닷가에서. 마음 둘 곳 없는 유년기 내내, 아저씨가 소년에게 그렇게 해주었다.
‘내 것이 될 리 없다’고 여겼던 소리들이
세 장으로 이루어진 영화 〈문라이트〉의 첫 번째 장 ‘리틀’은 주인공 리틀(앨릭스 히버트)이 인생 멘토 후안(마허샬라 알리)을 만나는 이야기다. 리틀의 아빠는 진즉에 가정을 버렸고 엄마(나오미 해리스)는 매일 밤 마약에 매달린다. 집에서는 엄마가 악을 쓰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욕을 한다. 작고 힘없는 흑인 소년 리틀의 세상은 온갖 날카로운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후안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영화 속 리틀의 모습 위로 음악이 흐른다. 차분하게 건반을 짚는 피아노 선율을 영화가 소년에게 처음 선물한다. 그때부터 후안과 함께 있는 장면마다 듣기 좋은 소리가 하나씩 더해진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후안 아저씨 목소리, 아저씨네 커플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소리, 평범하고 평온한 유년기에 어울릴 만한 적의 없는 소리. ‘내 것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소리들이 차츰차츰 리틀에게도 허락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2장, 3장에서도 소리는 중요하다. 리틀에서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으로, 다시 블랙(트레밴트 로즈)으로 이름이 바뀌며 성장하는 주인공의 삶에서는 희망도 굴레도 모두 소리로 표현된다. 장면에 맞춰 세심하게 매만진 음향과 음악 덕분에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에 정말 마법 같은 힘이 붙는다. 여기에 빛이 더해진다. 밤과 낮, 안과 밖, 레드와 블루. 상황에 맞춰 정교하게 선택한 빛과 색이 매우 컬러풀해 더욱 파워풀한 여운을 남긴다. 학창 시절 열심히 외우고도 마땅한 쓸모를 찾지 못해 여태껏 기억 속에 방치해둔 그 단어가 이제야 제 쓸모를 찾는다. ‘공감각적 심상.’ 아마도 〈문라이트〉를 위해 지금까지 아껴두었을 최적의 표현이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도 연출한 감독도 모두 영화 속 샤이론의 동네에서 자랐다. 그들의 어머니가 모두 샤이론 엄마처럼 마약중독자였다. 자신들이 성장하며 직접 보고 들은 모든 공감각의 세상을 기막히게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킨 두 사람. 태양빛에 바래 검게 지워질 뻔한 흑인 소년이 스스로 달빛에 물들어 푸르게 빛나는 이야기. 〈문라이트〉가 올해 아카데미상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세상 어딜 가도 흑인은 있지만 세상 어디에도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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