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그래미를 만들자.”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언젠가 습관적 구호가 된 문장 중에 하나다. 영화 쪽에 아카데미가 있다면 음악 쪽에는 그래미가 있다고 할 만큼, 그래미는 지난 반세기 이상의 세월 동안 엄청난 문화 권력으로서 지위를 누려왔다. 혹시 척 맨지오니라는 플뤼겔호른 연주자를 알고 있나? ‘필 소 굿(Feels So Good)’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그는 내한 공연 당시 ‘그래미 노미네이트’ 사실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던 바 있다. 그래, 맞다.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던 시상식, 그게 바로 그래미였다.

나는 방금 일부러 과거 시제를 썼다. 이유는 간단하다. 2017년 제59회 그래미 시상식을 보고 난 후, 그래미에 대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완전히 접어버린 까닭이다. 큰 기대도 없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본색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맞다. 적시해서 말하자면, 올해의 앨범은 비욘세의 〈레모네이드(Lemonade)〉가 탔어야 마땅했다. 이미 뮤지션과 비평가,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 ‘암묵적 합의’로서 올해의 앨범 최강 후보였던 비욘세는 이번에도 시원하게 물먹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죽하면 아델이 “이 상을 받기는 힘들 것 같다”라며 트로피를 반으로 쪼개서 비욘세에게 줬겠는가. 수상자까지 민망하게 하는 시상식이라니, 그래미 아카데미 위원들 좀 직접 보고 한소리 하고 싶은 심정 가득하다. “당신들 대체 언제까지 이럴래?”

ⓒReuter제59회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아델이 트로피를 반으로 쪼개 들어 보이고 있다.
나는 지금 아델의 〈25〉가 별로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까지는 나도 아델의 수상에 동의하는 편이다. 실제로 그녀의 곡 ‘헬로’는 2016년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 그런데 ‘올해의 앨범’이라고? 내가 예전에도 이 칼럼을 통해 주장했듯이 ‘개취’와 ‘취존’에도 어떤 한계는 있는 법이다. 개인사를 씨줄로, (동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두인) 여성주의와 인종차별 문제를 날줄로 엮어낸 비욘세의 작품 〈레모네이드〉의 성취는 가히 2016년을 통틀어 독보적인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면, 아델이 수상자로 나가서는 왜 비욘세 얘기만 하다가 소감을 끝냈겠나.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솔직히 시상식 초반에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새로운 사회자 제임스 코든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제법 괜찮은 랩 실력, 이 외에도 악플 읽기, 하의 탈의, 힙합 뮤지션의 신인상 수상 등을 통해 뭔가 변화의 조짐을 감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혹시 이것들이 올해 그래미가 특유의 ‘엄숙주의’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흑인음악 인정하지 않는 태도 여전

그러나 그래미는 그래미였다. 흑인 알앤비·솔·힙합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변함없이 드러내며 해외에서도 엄청난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각종 공연 실수까지 겹치면서 제59회 그래미는 어쩌면 2000년대 이후 최악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화이트 아카데미’ 아닌 ‘화이트 그래미’라는 조롱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그래미는 우리가 꾸준히 챙겨봐야 한다고 믿는다. 나 역시 과거에는 그래미를 본보기로 여겼다면, 이제는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도 그래미를 앞으로도 계속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장점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수상을 하지 않더라도 (거의) 모두가 참여하는 것만은 우리나라 시상식에서도 보고 싶은 풍경이다. 이를 위해서는 방송사마다 분리된 기형적 구조의 여러 시상식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과연 가능할까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Keep close your friend, keep your enemy closer).” 저 유명한 영화 〈대부〉의 대사다. 반면교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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