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지난해 말 그의 현상금을 1000만 달러에서 2500만 달러(약 290억원)로 대폭 인상했다. 테러의 아이콘이었던 오사마 빈라덴에게 걸었던 현상금에 맞먹는다. 2014년 6월29일 스스로를 ‘칼리프(이슬람 정치·종교 지도자)’로 칭하며 칼리파 국가인 이슬람국가(IS)를 세웠다고 선포했을 때만 해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존재였다. 얼굴 없는 셰이크(지도자)라 불린 그는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실명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이슬람국가 선포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영상을 통해 얼굴을 공개했다. 당시 그는 검은색 터번을 머리에 두른 성직자의 복장이었다. 검은 터번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라는 표시이다.

얼굴이 공개된 후에야 그의 신상이 조금씩 드러났다. 본명은 아와즈 이븐 이브라힘 알바드리. 1971년생으로 올해 나이 46세이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북쪽 사마라 지역 출신으로 바그다드 대학에서 이슬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수줍은 성격이어서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았다. 대학 동창 아흐메드는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유일하게 축구를 할 때만 친구들과 어울렸다”라고 증언했다. ‘BBC 페르시안’ 방송에 따르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인 2003년 어느 작은 모스크에서 이맘(이슬람 성직자)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미군이 알카에다 지휘관들을 수감하던 남부 이라크의 캠프 부카(Camp Bucca)에 4년간 갇혔다.

ⓒAP Photo2014년 7월5일 동영상을 통해 처음 공개된 IS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모습.
보통 거물급은 쿠바 관타나모로 이송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군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그는 2008년 석방된 뒤 한동안 행적이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부터 다시 등장한다. 이라크에 세워진 알카에다 연계조직이자 IS의 전신인 이라크 알카에다(ISIL)의 지도자인 아부 오마르 알바그다디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오마르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자, 2010년 5월10일부터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뒤를 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본명인 ‘이브라힘’을 버리고 죽은 자신의 상관 이름인 알바그다디라고 칭했다.

수줍은 성격의 이슬람학 박사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자 알바그다디는 자신의 부관인 아부 무함마드 알줄라니를 시리아로 파견했다. 당시 알바그다디가 이끌던 이라크 알카에다는 작은 무장조직에 불과했다. 시리아 사람들 처지에서는 그저 시리아 반군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무슬림 형제였을 뿐이다. 알바그다디는 시리아에서 승기를 잡자 돌변했다. 반군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조직을 키워 시리아 내에서 기반을 다졌다. 알바그다디는 삽시간에 시리아 동부 도시 라카를 점령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는 동부의 데이르에조르까지 손에 넣었다. 데이르에조르는 시리아의 대표적인 유전지대이다. 알바그다디는 자금줄을 거머쥐었다. 또 이라크와 시리아 접경 약 100㎞를 장악해 두 나라를 아우르는 영토를 확보했다. 데이르에조르 동쪽은 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연안이다. 이곳에서 이라크 북부 도시 모술과 서부 안바르 지역을 손쉽게 오갈 수 있다. 그렇게 IS는 급성장했다. 2014년부터 리비아·이집트 등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대하기도 한 IS는 지난해부터 서아프리카를 넘보기 시작했다. IS 선전 매체 아마크 통신은 최근 “말리에서 활동하는 무장조직 무라비틴(또는 무라비툰) 여단이 충성을 맹세했다”라고 발표했다.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이나 필리핀의 아부 사야프 같은 악당들도 IS를 중심으로 집결하고 있다.

ⓒReuter알바그다디와 함께 IS를 키운 이자트 알두리(2015년 사망).
알바그다디에게는 또 다른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이라크 정부를 수니파가 장악했다. 사담 후세인이 미군에 체포된 뒤 정부와 군에 포진했던 수니파 고위직들은 대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고향에서는 마침 알카에다가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담 후세인과 함께 몰락한 수니파 엘리트가 알바그다디와 손잡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봤던 이라크 북부 티그리트의 지역언론 기자 아와즈(가명)는 “알바그다디와 이자트 알두리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라고 말한다. 알두리는 사담 후세인과 같은 티그리트 출신이다. 집안이 가난해 평생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군대에 입대해 후세인을 만난 그는 서열 2위인 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2003년 정권이 붕괴한 뒤 연기처럼 사라진 그는 뒤에서 은밀하게 일을 꾸몄다. ‘바트당’의 대표를 이어받은 그는 알바그다디와 함께 IS 조직을 키웠다. 그는 IS가 모술과 안바르 지역을 점령하는 전투를 지휘했다. 특히 이라크군이 단 이틀 만에 IS에게 모술을 빼앗긴 것은 후세인 잔당 세력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알두리는 2015년 이라크군과 교전 중 7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알바그다디의 참모진에는 바트당이나 후세인 시절 이라크군 출신이 북적댄다. 이라크를 총괄했던 아부 무슬림 알투르크마니(2014년 사망)는 이라크 혁명수비대 영관급 정보 장교였다. 시리아를 담당한 아부 알리 알안바리 역시 전직 이라크군 소장이었다. IS라는 신생 무장 조직이 시리아와 이라크를 종횡무진했던 것은 이라크 정규 군대 장교들이 대거 합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AP Photo2014년 1월14일 터키 국경 인근인 시리아의 텔아비야드 마을에서 행진하고 있는 IS 전사들.
이라크 정규군 흡수하고 알카에다와 결별

수니파 후세인 잔당과 IS의 결합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2003년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미군은 이라크군을 전격 해체한 뒤 후세인 잔당 세력 색출에 열을 올렸다. 또 시아파 괴뢰 정권을 세웠다. 후세인 정부 시절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시아파가 칼자루를 쥐자 거꾸로 이제는 수니파가 벼랑 끝에 몰렸다. 이라크 정부는 수니파 세력의 근원을 없애려고 ‘바트당 퇴출법’까지 제정했다. 수니파는 바트당 당적을 갖는 것만으로도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전락할 위기를 맞았다. 수니파로서는 IS와의 동맹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IS는 같은 종파라도 알바그다디를 모욕하면 가차 없이 처형한다. 2015년 이슬람 설교자인 마흐무드 하산 알하얄리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에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IS는 알하얄리를 샤리아(이슬람 율법) 법정에 세우고 IS가 주장하는 칼리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그의 지인인 이맘 샤리프는 “알하얄리는 알바그다디를 이슬람 칼리프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했다. IS가 사람들을 처형하는 방식은 진정한 이슬람의 길이 아니며 샤리아 법을 어기는 짓이라고 설교했다”라고 증언했다. 알바그다디는 알카에다와도 결별했다. 알카에다의 총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알바그다디에게 시리아는 자브하트 알누스라(시리아 알카에다 조직)에게만 맡기고 이라크 문제에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알바그다디는 이를 거부하고 알카에다에 등을 돌렸다.

그는 신비주의·비밀주의를 철저히 지킨다. 심지어 지휘관 회의에도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난다고 한다. 그는 빈라덴이나 카다피처럼 표적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비밀스럽게 움직이는지 세계 최고의 정찰 시스템을 갖춘 미군조차 미로 속을 헤매는 중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에게 짐을 넘기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임기 마지막까지 그를 처단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는 유명한 러시아의 정보기관마저 따돌렸다.

ⓒAP Photo지난해 6월, 미국 올랜도 총기 테러범 오마르 마틴(위)은 테러 직전 IS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지난해 10월 시작된 이라크군의 모술 탈환작전은 알바그다디의 체포 여부 때문에도 관심을 모았다. 이라크 정부가 탈환 작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알바그다디가 모술에 은신했다고 확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알바그다디는 건재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이례적으로 육성 메시지를 공개했다. 알바그다디는 이미 모술을 빠져나갔고 이 메시지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알바그다디가 제거되면 어떻게 될까. 1인 친정체제였던 이전 테러 조직과 달리 IS는 조직 운영 자금과 군사장비 관리, 폭탄 공격 등 조직 운영 등이 철저히 분업화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망하더라도 다른 후계자가 IS의 분업 시스템을 이끌게 되리라는 것이 서방 언론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 IS 추종자들 사이에서 사망하면 곧 잊힐 조직의 지도자 이상의 위상을 과시하는 게 사실이다.

지난해 7월 프랑스 성당 테러범과 같은 달 독일 바이에른 주 안스바흐 자폭 테러범은 범행 전 휴대전화에 알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동영상을 남겼다. 지난해 6월에 벌어진 미국 올랜도 총기 테러범 오마르 마틴은 테러 직전 비상 구급전화 911에 전화해서 다급하게 충성 맹세를 하기도 했다. 자생적 테러리스트들은 범행을 저지른 이후에라도 조직의 일원으로 추앙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9·11 테러 때 알카에다 수뇌부는 자신들이 직접 기획하고 테러범을 훈련한 뒤 미국으로 침투시키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IS는 이렇게 시간도 걸리고 위험한 방법을 쓰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추종 세력을 끌어모으고 세뇌한다. 이 같은 ‘지하드 글로벌화’의 중심에 알바그다디가 있는 것이다.

기자명 김영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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