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웹툰 가운데 다수는 일본 만화의 스타일을 간략하게 변형한 그림체로 그려진다. 일본의 현대 만화는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와 그에게 도전하는 작가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데즈카 오사무는 깔끔하게 정리된 선을 활용하며 캐릭터가 밝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 ‘만화체’를 사용했고, 그에게 도전한 작가들은 거친 선을 쓰고 캐릭터들이 어둡고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극화체’를 사용했다. 일본 만화의 영향권에 있는 만화가들은 ‘만화체’ 또는 ‘극화체’ 사이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간다.

데즈카 오사무의 스타일 또한 다른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디즈니 스튜디오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디즈니 스튜디오의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37년, 디즈니 스튜디오는 세계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했는데, 당시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들은 1890년대부터 1910년대 사이에 유행한 미술사조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화집을 보면서 작화 스타일을 연구했다고 한다. 아르누보는 당시 공장에서 만들어지던 조악한 품질의 공산품에 반감을 느낀 예술가들이 수작업의 가치를 옹호하며, 당시 공작기계가 따라할 수 없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시작된 미술사조다. 아르누보는 지나치게 탐미적이며 장식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기계가 사람의 손보다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주류 미술에서 밀려났지만 패션 일러스트, 포스터 등 상업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창백한 말〉 추혜연 그림·다음 웹툰 연재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인 알폰스 무하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필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에 대해 감탄하며 관람했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작품을 만드는 게 아르누보의 목표였으니, 손으로 그릴 수 있는 그림 중 가장 정교하고 화려한 기술이 구현된 작품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르누보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만화가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었다. 다음 웹툰에서 연재 중인 추혜연 작가의 〈창백한 말〉도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기술을 연료로, 체력을 제물로〈창백한 말〉의 주인공은 수천 년 동안 산목숨의 피를 마시며 살아온,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괴물이다. 괴물은 겉으로는 인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감정과 생각 또한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괴물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자신의 꿈을 현실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죽거나 미친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창백한 말〉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괴물과 삶이 망가진 인물들 사이의 애증을 담아낸 드라마이다.

〈창백한 말〉은 현재 연재되는 웹툰 중 가장 정교하고 화려한 작화를 보여준다. 약간 과장을 섞어서 말하면 한 컷 한 컷이 아르누보 화풍의 일러스트를 보는 느낌이다. 주간 연재의 분량을 고려하면 작가가 엄청난 노동력을 투입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후기에 따르면 30시간 정도 자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창백한 말〉의 작화는 작가의 집념이 기술을 연료로, 체력을 제물로 삼아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웹툰의 작화는 기술적 숙련도보다는, 이야기를 적절한 스타일로 구현하는지가 중요하게 평가된다. 그러나 여전히 완성도 높은 그림에 대한 집념을 가진 작가들은 밤새워 그림을 그린다. 그중에는 ‘그림은 좋지만 이야기는 재미없는’ 만화로 평가되는 작품들도 있지만 〈창백한 말〉은 이야기와 그림 모두 높은 밀도를 가진, 보기 드문 작품이다. 만약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져 대부분 작업을 작가의 기술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기능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창백한 말〉처럼 높은 밀도의 작화를 구현하는 만화는 사라질까? 그때는 아마 다른 방식으로 높은 밀도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등장할 것이다. 다른 작가들이 프로그램의 기능을 이용해 쉽고 간편하게 그리는 방법을 연구하는 동안 그들은 프로그램의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서 작화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리고 역시 마감 전날에는 밤을 새울 것이다.

기자명 박해성 (만화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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