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시사IN〉 편집국으로 들어오는 신간 수십 권을 검토하다 보면 종종 갈증이 느껴진다. 불특정 다수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기준으로 합당한 책을 골라야 한다. ‘나’라는 개인의 취향과 선호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독서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한 독서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렸다. 자꾸만 가난해지는 마음이 문득 걱정됐다.

‘사적인 서점’의 책 처방 프로그램을 신청한 건 그 때문이었다. 신청서의 빈칸을 메우는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름과 연락처 등을 빠르게 메워나가다가 ‘좋아하는 책 세 권을 꼽아주세요’라는 문항 앞에서 오래 서성였다. 소설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를 읽다가 그어둔 밑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당신의 독서 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라던. 내가 읽어온 책은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다. 약간의 수치심을 달래며 고심 끝에 세 권의 목록과 그 이유를 적어 제출했다. 몇 시간 뒤 메일로 방문 시간이 공지됐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적인 서점은 한 사람만을 위한 예약제 서점이다. 오픈데이로 운영되는 토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엿새 동안은 오직 한 명만을 위해 열린다. 건물 입구의 작은 입간판을 제외하곤 따로 간판을 달지 않았다. 일반 서점인 줄 알고 무작정 방문하는 손님을 사전에 거르기 위해서다. 사적인 서점의 주인 정지혜씨는 “이 공간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사적인 서점의 주인 정지혜씨(왼쪽)는 “책에 대해 질문하면서 다른 삶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사적인 서점의 아이디어는 덴마크의 ‘주치의 제도’에서 얻었다. 덴마크 국민은 모두 국가가 지정해준 주치의가 있다. 한번 정해지면 의사가 은퇴할 때까지 쭉 이어지다 보니 3대가 한 주치의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의사는 자연스럽게 건강뿐만이 아니라 삶과 일상까지 일정 부분 돌보게 된다. 편집자로, 또 서점 직원으로 일했던 정씨는 서점도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 처방 프로그램’을 사적인 서점의 콘셉트로 잡은 까닭이다. 베스트셀러나 권장 도서 대신, 대화를 통해 손님의 취향과 관심에 맞는 독서 차트를 만들고 맞춤형 책을 처방하면 어떨까. 삶을 책으로 풍요롭게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처방하는 과정은 질문을 선물하는 일

지난 4개월 동안 별다른 홍보 없이도 150명의 손님이 알음알음 찾아와 정씨에게 책을 처방받았다. 한 시간가량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가격은 5만원이다. 언뜻 비싸게 느껴지지만 정씨가 들이는 품과 시간을 생각하면 비싼 가격은 아니다. 5만원에는 책값 및 배송비, 찻값, 정씨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이른바 상담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정씨도 처음에는 고민이 깊었다. “책을 정가에 사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데 이게 될까. 한 명도 예약 안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많았다.” 한동안은 3만원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가격이 1만5000원 넘는 책은

ⓒ시사IN 윤무영
처방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님에게 처방하고 싶은 책이 비싸면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치지 않으려면 지속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3개월간 운영하면서 확신이 생겼다. 1월부터 이용료를 5만원으로 올렸다. 손님은 오히려 늘었다.

상담이 끝나면 대략 열흘 후 택배로 처방 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책 복용법’도 동봉된다. 정씨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책 네다섯 권을 차트에 메모한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 책을 다시 읽는다. 읽지 않았지만 검토했던 책이 떠오르면 그 책도 찾아 읽는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 왜 이 책을 골랐는지, 이 책을 손님이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등이 주요 내용이다. 권하고 싶은 문장을 발췌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곁들인다.

신청서의 질문이 그러했듯이, 독서 차트를 작성하기 위해 정씨가 던지는 질문도 간단치 않았다. 손이 자주 가는 분야의 책이나 피하게 되는 책, 책을 읽는 이유 등을 묻는 식이다. 정씨가 주로 하는 일은 책 처방이지만, 실은 질문을 선물하는 일이기도 했다. “저나 손님이나 서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편견이 없으니까 더 말하기 좋은 거 같다. 이게 재밌는 지점인데 저는 책에 대해 질문하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드러난다. 그렇게 다른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경험을 또 다른 손님과 나눌 수 있다.”

정씨는 자신이 참여했던 한 독서모임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포레, 2014)를 읽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추리소설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작가 이름 앞에서 망설였다. 1944년 영국에서 출판된 이 책은 추리 작가로 명망이 높았던 작가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썼던 심리소설이다. 50년 가까이 실제 저자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름은 비밀에 부쳐졌다. 책장을 넘기던 정씨는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편견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놓치고 있는 아까운 책이 얼마나 많을까’라고 생각하니 모든 책이 다시 보였다.” 독서 차트를 꼼꼼히 작성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손님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또 어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파악해 되도록 의외의 책을 골라주고 싶다.

손님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적인 서점을 찾는다. 원래 책을 많이 읽는 손님도 오지만 그보다 더 반가운 손님은 아직 책을 ‘즐겁게’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책을 별로 안 읽었지만 관심은 있는 사람들, 뭘 읽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입구’가 되고 싶다.” 정씨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책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 자못 엄격하다.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을 보는 일에는 그러지 않으면서 책에서는 꼭 ‘무언가’ 얻어야 한다고 느낀다. 유명한 책이나 고전류를 읽지 못했다는 부채감도 다들 있었다. 정씨는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거나,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같은 말들이 오히려 사람과 책을 멀어지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억지로 읽기보다 한 권이라도 재미있게 읽는 경험, 사적인 서점은 그 경험을 파는 공간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