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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대령이 트럼프를 만난다면

대륙횡단철도 공사를 위해 중국인이,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조선인이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일본인도 미국을 위해 싸웠다. 이주민의 피와 땀으로 일궈진 미국은 차별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2월 24일 금요일 제4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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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는 곧 이민의 역사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국인 영국 메이플라워 호에 몸을 실었던 청교도 102명은 물론이고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대기근을 피해 조국을 탈출해야 했던 수백만명의 아일랜드 사람들, 유럽 기독교인들의 노골적인 차별에 시달려온 유대인, 영화 <대부>에서 보듯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서양을 건넜던 수많은 이탈리아인, 머릿수 하나는 세계 최강이고 전 세계 안 간 곳이 없다 할 중국인들, 그 외 오대양 육대주 곳곳에서 온 수많은 이민자들이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찾아왔고 그들의 인생과 개인사를 쌓아올린 게 미국의 역사야.

물론 거기에는 한국인도 빠지지 않지. 20세기가 막 열렸던 1902년 대한제국 백성 100여 명이 ‘지상낙원 하와이’에 사탕수수 재배 노동자로 이민을 떠나게 되니까. 미국 공사 앨런의 주선이었지. 그런데 이 최초의 한국인 해외 이민은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배반한 사례라 할 ‘중국인 이민 금지령’의 부산물이었어.

ⓒ민병용 관장 제공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됐어. 미국 전역은 물론 남미와 유럽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고, 광산 노동자로 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도 대거 유입됐어. 이른바 골드러시(Gold Rush)지. 중국인들이 많아지자 캘리포니아의 미국인들은 세금을 더 부과하거나 광산에서 내쫓는 등 중국인들을 탄압하지.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거대한 일거리가 남아 있었어. 1862년 발주된 대륙횡단철도 공사였다.

미국 중부에서 태평양 연안까지를 잇는 이 공사는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공사였고 그만큼 위험했어. 벼랑에 길을 내기 위해선 사람을 줄을 매단 바구니에 담아 벼랑 중턱에 갖다 대어 폭약을 장착해야 했는데, 발파 시간이 어긋나거나 착오가 생겨버리면 중국인 수십명의 목숨이 달아나는 건 일도 아니었지. 오죽하면 철도 침목 하나에 중국인 목숨 하나라고 했을까. 본국으로 보내진 중국인들의 유골이 10t에 달했다는 말도 있으니 짐작하겠지?

그러나 중국인 노동자들은 공로를 치하받기는커녕 미국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돼. 저임금의 중국인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고 여긴 미국 노동자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중국인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억지가 퍼지면서 마침내 1882년 5월6일 체스터 아서 대통령은 ‘중국인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에 서명하게 된다.

ⓒ연합뉴스
‘역대 미국 전쟁영웅’ 16인 중 한 명으로 꼽힌 김영옥 대령.
이후 중국인 노동자는 미국 입국이 거부됐고 미국을 떠났다가 재입국하려면 특별한 증명서를 내밀어야 했지. 이 중국인배척법이 발효되면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인력 수급이 어려워졌단다. 그 대체 인력으로 들여온 일본인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아 폭동을 일으키는 따위 골치 아픈 사태가 이어졌지. 미국 공사 앨런은 한국인들을 하와이에 보낼 생각을 하게 됐던 거란다. “복종에 익숙하고 유순하다”라는 좀 같잖은 이유로 말이다.

이후로도 이민은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많은 일본인도 ‘아메리칸드림’의 대열에 동참했어. 그런데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해군기지를 공습하면서 미국 내 일본인 사회는 무시무시한 폭풍을 맞게 돼. 흡사 독일 나치의 유대인 축출과 비슷한 일본계 미국인 격리령이 떨어진 거야. 행정명령 9066호.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이유로 무려 11만명에 이르는 일본계 미국인이 정든 고향과 집을 떠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막이나 산악지대에 위치한 ‘캠프’에 갇혀 살게 돼.

그런데 이 일본계 미국인 젊은이들, 이민 2세, 3세들은 자신들의 미국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고자 자원입대하게 돼. ‘니세이(二世)’ 부대라고 불린 그들은 미군 442연대 100대대로 편제됐는데 이들은 유럽 전선에서 대활약을 한다. 일본계이기 이전에 미국인으로서 충성을 보이고 싶었던 그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전투를 벌여 ‘훈장 대대’라고 불릴 만큼 많은 훈장을 따냈고 빛나는 전공을 세웠지.

“미합중국 시민으로서 차별과 싸워 승리했다”


그런데 이 100대대를 지휘한 건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1919~2005)이었어. 2011년 MSN 닷컴이 선정한 ‘역대 미국 전쟁영웅(Famous War Heros)’ 16인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위대한 전공을 인정받은 분이지. 그는 제대 후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했고 고령의 몸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인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단으로 일하기도 했어.

김영옥 대령(한국군 군사고문단 근무를 위해 장성 진급을 사양했어)은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 타운 리틀도쿄에 세워진 100대대원 추모비 건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 그 비문에는 니세이 부대의 참전 경위와 전과도 기록돼 있었지. 비문 문안 검토를 부탁받은 김영옥 대령은 펜을 들어 딱 한 단어를 고쳐. 미국 정부가 미국 내 일본인들을 억류(internment)했다는 것을 강제수용(concentration)으로 바꾼 거지. 단순한 억류가 아닌 인종차별적인, 즉 나치의 행태와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비문에 남긴 거야.

ⓒAP Photo
2010년 10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일본계 미국인 참전용사들과 만났다.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일본인 3세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내려 할 때 일본인 사회의 압력이 대단했다고 해. 이때 혼다 의원은 김영옥 대령을 찾아갔고 김영옥은 자신들의 옛 부하들에게 이렇게 설득했어. “우리는 대체 뭘 위해 싸웠나?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건 바로 미국이 내세웠던 가치였겠지.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은 니세이 부대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적과의 전투뿐만이 아니라 편견과 차별과도 싸워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미합중국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해낸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견·차별과 싸우는 것 또한 미합중국 시민의 의무라는 얘기 아니겠니. 결국 일본인 참전 동지회는 위안부 결의안에 찬성 의사를 밝히게 돼. 오랜 진통 끝에 2007년 위안부 관련 결의안은 미국 하원을 통과하게 된단다.

1978년 미국 의회는 5월을 ‘아시안 아메리칸 문화유산의 달’로 지정하게 돼. 중국인들의 피땀으로 건설한 대륙횡단철도 완성 기념일이 1869년 5월10일, 일본 이민자가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게 1890년 5월7일이었기 때문이야. 아시안 아메리칸뿐 아니라 수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그 장단점과 특징과 문화를 한 용광로에 털어넣고, 각양각색이지만 하나의 아메리카 합중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해간 나라가 미국이란다.

미국이 마땅치 않은 점도 많지만 아빠는 꿈을 찾아온 이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역사,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때도 있었으나 역시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되레 차별을 범죄로 만들고 죄악으로 그득한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낸 역사만은 존경하며, 그 대목에 관한 한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고 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는 말이야.

당선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은 19세기의 강퍅한 캘리포니아인들, 1941년의 파렴치한 미국 정부 같은 명령을 내려 전 세계를 혼란으로 빠뜨렸지. 아빠는 오늘부터 날마다 트럼프의 꿈속에 대륙횡단철도 건설 때 죽어간 중국인들이 열 명씩만 나타나 그에게 주먹을 휘둘러주기를 바란다. 그 악몽 끝에는 김영옥 대령이 나와서 이렇게 묻겠지. “우리는 대체 뭘 위해 싸웠나?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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