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우리 대학에서 열린 한 토론회 행사장에서 학생 P를 우연히 만났다. “저 앞줄에 앉은 애들도 다 저희 과 학생들이에요.” P는 어떻게 오게 됐느냐는 질문에 겸연쩍게 웃으며 앞쪽 친구들을 가리켰다. 웃음의 의미가 토론회 자료집에 담겨 있었다. 자료집에 적힌 패널 4명 중 한 명이 P의 지도교수였다. 학생 예닐곱 명이 동원돼 왔지만 방청석은 여전히 듬성듬성했다. 토론회 말미, 사회를 맡은 다른 교수의 요청(이라 쓰고 강요라 읽는다)에 못 이겨 P의 친구 두 명이 없는 질문을 쥐어짜낸 뒤에야 행사가 마무리됐다.

대학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1년 내내 이어진다. 세미나 같은 진지한 자리부터 학생들이 주관하는 아기자기한 이벤트까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을 수시로, 그것도 무료로 접할 수 있다. 이런 공간이 대학 말고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 가운데 특정인을 위한 자리이거나 내실 없이 허울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학교 차원에서 주관하는 행사들이 특히 그렇다. 한번은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생들을 위한 특강 행사가 기획됐다. 행사 담당자는 어떤 명사를 섭외해야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지 궁리했다. 그러다 상부의 방침에 생각을 접었다. 결국 하루 동안 진행된 릴레이 특강의 연사 세 명 중 두 명이 현역 국회의원으로 결정됐다. 학교 처지에선 중요한 민원 창구인 국회의원과 식사 한번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기회였다. 국회의원도 대학생들 앞에서 마이크 잡을 일이 절로 생기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행사의 경우는 학생뿐 아니라 행정직원들에게도 빈자리를 메우러 오라는 동원령이 떨어진다.
 

ⓒ김보경 그림


물론 강연자가 거물급 정치인이거나 정부 고위 관계자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언론은 물론 학생들도 먼저 관심을 갖고 강의실로 찾아온다. 동원할 필요가 없다. 대신 어느 정도 ‘각본’이 요구된다. 초청에 관여한 교수나 직원들은 혹여 학생들의 질문이 없을까 봐 “다른 질문이 안 나오면 질문 좀 부탁한다”라며 사전에 몇 명을 섭외해두곤 한다.

‘수업 출석 인정’ ‘식권 지급’으로 학생 동원

강연자나 패널이 하고픈 말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도록 미리 특정 학생에게 질문 자체를 쥐여주는 경우도 있다. 우리 대학에서 열린 한 토론 행사가 그랬다. 대학교수와 민간 전문가, 정부 관료 등이 패널로 나온 그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 기획 업체가 작성한 대본대로 진행됐다. ‘수업 출석 인정’ ‘식권 지급’ 같은 당근에 이끌려 온 학생들은 이런 행사장에 앉아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행사를 위한 행사의 ‘끝판왕’은 기관 대 기관의 ‘업무 협약식’이다. 심지어는 기관장이 바뀌었다고 몇 년 전 협약 맺은 곳과 비슷한 협약식을 또 여는가 하면, 총장의 지인인 상대 기관장이 대학에 특강하러 온 김에 급조된 협약을 겸사겸사 체결하고 가기도 한다. 협약 내용은 판에 박힌 듯 대동소이하다. 협약서에 적힌 기관명만 바꾸면 또 다른 협약식 때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협약서를 펼쳐들고 카메라 앞에 선 기관장들의 어색한 포즈마저도 협약식마다 비슷하다. ‘학생 교류 협력’ ‘공동 프로그램 개발·운영’ ‘공동 연구’ 같은 협약서 문구가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도 포털사이트에서 ‘대학 업무 협약’으로 검색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관련 기사가 나올 정도로 협약식이 넘쳐난다. 홍보물 제작, 참석자 밥값과 의전, 직원이나 학생 동원 등에 소요되는 비용은 다름 아닌 대학 예산에서 지출된다.

이런 행사가 끝나면 “누구를 위한 행사냐” “예산이 아깝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겉치레뿐인 행사, 누군가 동원되지 않으면 서로 어색해질 행사를 자주 겪다 보면 구성원들의 관심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다가오는 새 학기, 캠퍼스 곳곳에는 행사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과 포스터들이 어김없이 내걸릴 것이다. 대학 구성원들의 소중한 시간과 돈이 홍보용 현수막이나 포스터 신세처럼 일회성으로 버려지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기자명 이대진(필명∙대학교 교직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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