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세요.” 가수 김광석이 공연 마지막에 노래를 들려주면서 항상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 행복하고 싶지 않은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뜻 내세울 답을 찾는 것이 점점 어려운 세계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도처에 산재한 문제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시점에,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 일상의 삶과 참으로 동떨어진 사치스러운 말로 들린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 지순한 웃음을 가져오는 그 행복감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살아야 한다면, 이 살아감의 의미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행복한 나날들(Happy Days)〉에는 위니(Winnie)라는 이름의 50대 여성이 등장한다. 1막에서 위니는 허리까지 모래에 묻혀 있는 모습이다. 하반신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래도 위니는 양치질을 하고, 핸드백을 소제하고,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끊임없이 독백을 한다. 2막에서 위니는 이제 턱까지 모래에 잠긴다. 그녀는 더 이상 머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혼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관계들은 깨어지고,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될 거야’라는 공허한 독백뿐이다.

이 희곡은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의 모습, 스스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인간의 모습, 그럼으로써 육체는 살아 있지만 사실상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인간, 즉 조르조 아감벤의 “살아 있는 죽은 자(living dead)”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니는 자신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모래에 턱이 묻힐 때까지도, 자신이 아무런 변화를 이룰 수 없는 무력한, 부자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위니는 사실상 우리의 모습을 아프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지순한 행복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모래’는 무엇일까.

획일화된 삶의 방식과 사유 방식을 요구하는 다양한 제도들은 우리의 일상적 공간을 지배하면서, 각자가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개별성을 묻어버린다. 한 사회가 만들어낸 정형화된 삶을 따라 사는 것만이 ‘확실한 안전성의 삶’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굳건히 믿게 한다. 이러한 획일화된 가치체계는 정치·경제·교육·예술과 같은 공적 공간만이 아니라, 가정이나 여타의 친밀성의 관계 등 사적 공간들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정형화된 제도적 삶에 대한 무비판적 맹신은 우리로부터 모든 물음표를 제거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모래’의 기능을 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가치를 종교화한 다양한 종교들은 그 현상 유지와 권력 확장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구원과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생명성을 억누르는 ‘모래’들을 퍼붓는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모래’들은 그 모래가 턱까지 차올라서 모든 자유가 차단되는 것과 같은 처절한 부자유의 삶, 지순한 행복감이 부재한 삶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삶의 문제와 치열하게 씨름하며 ‘살아 있음’의 희열을

‘살아 있음’이란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다. 획일적이고 제도적인 삶이 강요되는 세계 한가운데에서도, 개별인들이 자신에게 지순한 웃음을 웃게 하고, 살아 있음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틈새 공간’들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치열하게 씨름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제거되어야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실패들, 그리고 문제와 딜레마들 때문에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 속에 처해 있든지 인간에게 ‘문제없는 삶’이란 없다. 이러한 다층적 문제들이 제거되어서가 아니라 그 문제들 한가운데서, 생명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 각자는 자기 고유의 ‘행복한 나날들’을 만들어가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죽은 자’로서의 삶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사실상 매일 크고 작은 행동과 방향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선택들의 연속이기도 하다. 냉소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무수한 삶의 문제들 한가운데서 자유와 행복의 삶을 창출하기 위한 치열한 씨름을 하며 살 것인가. 이 문제 많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기만의 ‘행복한 나날들’을 창출하는 그 자유를 확장하고자 씨름하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지순한 웃음을 가져오는 행복의 순간들과 조우하게 되지 않을까.

기자명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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