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패션 사업가 밥 블랜드(33)가 본격적으로 정치운동에 뛰어든 것은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 말 미국 대통령 후보 3차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트럼프의 탈세 경력을 추궁했다. 트럼프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이런~ 못된 여자 같으니(Such a nasty woman)!” 블랜드는 ‘클린턴이 못된 여자라면 나도 마찬가지잖아’라고 생각했다. 오냐, 기꺼이 못된 여자가 되어주마! 그녀는 즉시 ‘못된 여자 티셔츠’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티셔츠지만, 공통적으로 가슴 부위에 “못된 여자라서 자랑스러워” “못된 여자는 투표한다” “미국엔 못된 여자가 필요해” 따위 문구를 큼직하게 박았다. 언론과 SNS에서 화제로 떠오르며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블랜드는 여러 대형 패션업체를 거치며 뼈가 굵은 디자이너다. 요즘 패션업체들이 미국에서 하는 일은 디자인과 마케팅뿐이다. 섬유를 자르고 다듬고 깁는 봉제 노동은 중국, 캄보디아 등 저임금 국가로 아웃소싱된다. 이렇게 생산된 초저가 의류가 다시 수입되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옷을 만들어봤자 가격 경쟁력이 없다. 아니면 봉제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혹사시켜야 한다. 블랜드가 2012년 뉴욕 브루클린에 설립한 ‘매뉴팩처 뉴욕’에는 미국의 의류 제조업과 봉제 노동을 부활시키겠다는 포부가 실려 있다. 일종의 ‘패션업체 인큐베이터’다. 패션 스타트업과 봉제 노동자들을 연결해 협업을 유도하고, 이들의 아이디어를 상업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작업장과 노하우를 제공한다. 의류 제작 장비를 공동으로 사용해서 생산비도 절감한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에서 패션산업의 전 과정(디자인부터 제작, 마케팅까지)을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실험이다. 못된 여자 티셔츠 역시 매뉴팩처 뉴욕에서 제작했다.

ⓒMANUFACTURE NEW YORK

그러나 트럼프는 지난해 11월8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말았다. 이틀 뒤인 11월10일 블랜드는 ‘여성들이 반(反)트럼프 시위를 벌이자’는 주제로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다. 이 아이디어가 굴러가며 판이 커지고 넓어졌다. 여성뿐 아니라 유색 인종, 성 소수자, 이민자, 무슬림 등 다양한 ‘정체성’들이 트럼프로부터 위협감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인 블랜드뿐 아니라 여성 활동가들인 타미카 맬러리(아프리카계), 카르멘 페레스(히스패닉계), 린다 사르소어(아랍계) 등으로 4인 공동대표 체제를 만들었다. 시위명은 ‘여성들의 행진(The Women’s March)’으로 정했다. 여기서 ‘여성’은 모든 약자와 피억압자를 상징하는 보편적 이름이다. ‘성명서’에도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며, 인간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다음 날(1월21일) 워싱턴 등에서 열린 행진에는 미국에서만 최대 42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블랜드의 기획(디자인)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녀는 이날 연설에서, 자신의 두 딸(한 명은 시위를 준비하던 시기에 출산)에게 “여성들의 단결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USA 투데이〉에 따르면, ‘여성들의 행진’ 측은 2월2일부터 미국 전역과 해외에 풀뿌리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1월21일의 대규모 시위에서 확인된 다양한 목소리들에 지속성을 부여하겠다는 이야기다. 첫날 오전에 이미 378개 풀뿌리 조직이 ‘여성들의 행진’에 등록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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