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가지 않고 방방곡곡을 헤매던 지우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심정을 단박에 이해하게 됐다. 1월24일 국내 정식 출시된 위치 기반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 ‘포켓몬고(GO)’를 켠 채 스마트폰을 들고 걷는 동안, 영하 10℃를 밑도는 날씨에 자꾸만 손이 곱았다. 아무렴 포켓몬 마스터가 되는 길이 쉬울 리가 없다. 주머니에 손 넣을 새도 없이 자꾸만 튀어나오는 포켓몬과 활성화되는 포케스톱(PokeStop)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웠다.

설 연휴 끝 ‘힘든’ 출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역시 포켓몬고 덕분이었다. 사무실 근처에는 포케스톱이 몇 개나 있을까. 출근이 두근거리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포켓몬고를 시작한 이래 외부로 취재 나가는 일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몬스터볼(포켓볼·포켓몬을 사냥할 때 던지는 공) 모으러 가자!’ 한국을 포함해 포켓몬고가 출시된 국가는 150여 곳. 전 세계 사용자 6억명이 포켓몬고를 하면서 움직인 거리가 이미 87억㎞다. 그 발걸음에 내 걸음을 보태다니. 코스모폴리탄의 감각이 절로 자극됐다. 광고 문구를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야, 나두 포켓몬고 한다.”  

하지만 포켓몬고 게임을 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을 공급하는 사각 큐브 모양의 포케스톱은 ‘빈익빈 부익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려줬다. 웬만한 번화가가 아니고서는 포케스톱을 만나기 어렵다. 시내 나온 김에 몬스터볼을 잔뜩 주워두어야 집에 돌아가서도 포켓몬고를 즐길 수 있다. 몬스터볼이 떨어졌는데 포켓몬이 출몰하기라도 하면 ‘현질(아이템 유료 구매)’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시사IN 조남진
오죽하면 포케스톱 밀집 지역을 뜻하는 ‘포세권’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을까. “약속 장소 잡을 때는 홍대 설×, 인사동 오×록으로 합시다. 실내 트리플 포세권입니다(앉아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포케스톱이 세 곳이라는 의미).” 포케스톱은 5분에 한 번씩 재활성화된다. 실내 포세권에서라면 따뜻한 곳에 앉아서 계속 아이템을 주울 수 있는 셈이다. 해외에서는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와 연계해 프로모션을 진행한 바 있다. 국내 업체와의 제휴도 점쳐진다.

따뜻한 곳에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또 있다. GPS 기반이라 지하철에서는 포케스톱을 만나기 어렵지만, 버스를 이용한다면 포케스톱을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 포케스톱 밀집 지역에서 차라도 막히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 하지만 16㎞ 이상의 속도는 ‘걸음 수’로 쳐주지 않으니, 교통수단을 이용해 포켓몬 알을 부화시킨다는 등의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하자.

포켓몬고 덕분에 역사 공부한다

포켓몬고는 거리의 풍경을 바꿨다. 서울의 대표적 번화가인 종로 일대는 ‘포켓몬 마스터’ 지망생에게 그야말로 ‘축복의 땅’이었다. 걸음 떼는 자리마다 포케스톱이 있었고, 못 봤던 포켓몬이 튀어 나오고, 무엇보다 한겨울 ‘벚꽃축제’가 한창이었다. 포켓몬고 사용자는 포케스톱에 루어모듈(다양한 포켓몬을 불러내는 아이템)을 30분간 실행시킬 수 있는데, 이런 포케스톱에서 레어 포켓몬을 만날 가능성이 다른 곳보다 높다. 루어모듈이 적용된 포케스톱에서는 꽃가루가 날리는데 종로에는 그런 포케스톱을 쉼 없이 목격할 수 있다.

ⓒ연합뉴스2월1일 대전 동부경찰서는 포켓몬고 집중 출몰 지역에 대한 안전사고 주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역시 포케스톱 밀집 지역 중 한 곳이었다. 1월1일부터 60일간 진행된다는 ‘구국 기원 탑돌이’ 안내 현수막을 바라보는 포켓몬 마스터 지망생인 내 마음 역시 뜨거워졌다. 포켓몬고를 하며 탑돌이를 하는 동안 나도 ‘애국시민’이 됐다. ‘탄핵 기원’을 중얼대며 스마트폰에 코를 처박고 탑골공원을 배회했다. 한 차례 탑돌이를 마치고 탑골공원 삼일문 맞은편 횡단보도에 서자 새로운 포케스톱이 활성화됐다.

포케스톱을 손가락으로 밀어(스와이프) 활성화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방금 아이템을 얻은 포케스톱은 바로 시인 김수영의 생가 터를 알리는 비석이었다. 그동안 아마 수백, 수천 번은 오갔을 길이건만 단 한 번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비석 하나가 정말 있었다. 곧 ‘풀’ 성향 포켓몬인 뚜벅초가 비석 주위에 떴다. 김수영의 대표 시 〈풀〉을 떠올리다 하마터면 ‘뚜벅초가 눕는다’라고 소리낼 뻔했다. 그때부터였다. 포케스톱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 건.

포케스톱은 포켓몬고를 만든 나이언틱의 전작 게임 인그레스(Ingress)의 GPS와 동일하다. 사용자의 신청에 따라 역사·교육적 가치가 높은 장소나 명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나 도서관 등 공공장소를 기준으로 승인·생성됐다(현재는 신청 불가). 궁궐도 대표적 포케스톱 밀집 지역 중 하나인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이 CP(공격력·방어력·체력 따위 능력치의 총합)가 높은 포켓몬을 발견하고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었다면 어땠을까. 포켓몬고와 함께 종로 일대를 도는 동안 나는 내내 김수영과 그의 시를 실로 오랜만에 생각했다.

이 같은 포케스톱의 특성을 이용한 ‘포켓몬 로드’ 상품을 개발해보면 어떨까. 국내 정식 출시 전 잠시 포켓몬고가 열렸던 속초는 버스표를 매진시키면서까지 몰려드는 유저들을 위해 무료 와이파이 지도를 공개하는 등 게임과 관광을 발빠르게 연계했다. 포케스톱 밀집 지역으로 알려진 관광지 및 지자체 역시 포켓몬고 열풍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경남 김해국립박물관이나 한국민속촌은 SNS를 통해 관내에 위치한 포케스톱 지도를 올리기도 했다.

종교시설이나 추모시설 내 포케스톱을 방문하는 유저들 탓에 부작용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충분히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이한열 기념관이나 노수석 추모비도 포케스톱인데 이를테면 ‘포켓몬 로드-민주화운동 편’을 만들어 연결시킬 수도 있다. 전국 곳곳에 포케스톱을 활용한 올레를 만드는 꿈을 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미 실제 사례도 있다. 나이언틱 일본 법인은 지진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와 구마모토 등에 희귀 포켓몬을 출현시키는 것으로 관광 활성화에 협력하기도 했다. “라플라스(포켓몬 캐릭터의 한 종류)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일본 동북 해안 지방으로 여행 오세요!”라는 광고는 수많은 포켓몬고 유저를 유혹했다. CNN은 이 같은 포켓몬고의 열풍을 금광이나 석유에 비교하기도 했다.

경찰의 발빠른 대응도 눈에 띈다. 해남경찰서는 소속 경찰 전원이 포켓몬고를 깔았다. 포켓몬 출몰 장소를 파악해 안전사고 주의 현수막을 걸고, 범죄 취약 지역 순찰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전국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참고로 운전 중 포켓몬고를 하면 범칙금 6만원에 벌점 15점이다. 게임에 목숨까지 걸지는 말자.

포켓몬고를 출시한 6개월 동안 나이언틱이 올린 매출은 9억5000만 달러다. ‘포켓코노미(pokemon+economy)’는 과장이 아니다. 포켓몬고 한국 출시 열흘째였던 2월2일, 모바일 앱 분석기관 와이즈앱에 따르면 포켓몬고를 다운받은 사람은 758만명에 이른다. 안드로이드 기반의 휴대전화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폰 유저까지 더하면 1000만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전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포켓몬고를 경험한 셈이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빠른 속도로 닳는 게임 특성 덕분에 스마트폰 충전 관련 매출도 크게 늘었다. GS25가 2월1일 내놓은 보조 배터리 판매량과 충전 서비스 매출을 보면, 전년에 비해 30% 이상 오른 것이 눈에 띈다.

포켓몬 수집 외에 콘텐츠 부족 지적도

이 열풍이 얼마나 갈까. 해외에서는 출시 3개월 만에 매출과 이용자 수가 급감하며 ‘반짝’ 돌풍에 그치기도 했다. 포켓몬을 수집하고 체육관을 점령하는 것 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3월 대규모 업데이트가 예정돼 있지만, 이용자들을 그때까지 붙잡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일본에서 1995년 게임으로 먼저 출시된 포켓몬은 지난 20년 동안 꾸준한 인기에 힘입어 새로운 시리즈를 거듭해왔다. 151종류의 기본 포켓몬으로 시작됐던 포켓몬은 현재 800종류에 달한다. 진화와 강화라는 ‘세계관’이 존재하는 한, 포켓몬은 끝없는 이야기다. 포켓몬고의 인기는 증강현실 게임이라는 사실보다, 지난 20년간 포켓몬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닌텐도의 공이 크다. 이처럼 축적된 역사를 나이언틱이 발빠르게 업데이트 할 수 있는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나이언틱의 적은 나이언틱’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한국 출시가 6개월 이상 미뤄진 것도 구글 지도 반출 문제라기보다는 나이언틱의 내부 문제가 컸다. 모바일 게임 개발사인 나이언틱은 구글에서 스핀아웃(분사)된 스타트업이다. 1월24일 기자회견을 위해 한국에 온 데니스 황 나이언틱 이사는 “우리는 아직 작은 규모의 회사다. 포켓몬고의 인기가 예측하지 못할 만큼 커서 우리도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로컬라이징(지역화) 작업에 많은 시간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나이언틱 측은 지도 문제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회피로 일관하면서 무성한 말을 낳기도 했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가 처음 방영된 것은 1999년 7월이다. 이제는 어른이 된 수많은 어린이들이 〈포켓몬스터〉 주인공인 지우와 이슬, 웅이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훌륭한 포켓몬 마스터가 되고 싶은 지우의 꿈은 기술 발전과 더불어 현재진행형이다.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어른이 된 우리에게 포켓몬 마스터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는 방법으로 말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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