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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임법은 처음입니다만

2차 성징이 시작되면 40년 넘는 시간을 좋든 싫든 피임과 연관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각종 피임 시술은 일절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국가가 여성의 몸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7년 02월 16일 목요일 제4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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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피프티 피플>(정세랑 지음, 창비 펴냄, 2016) 속 이수경은 폴리우레탄을 믿는다. 0.01㎜ 두께의 콘돔이 그렇게 맨살과 차이 날 리 없다고, 다음 세대의 콘돔은 소수점 세 자리까지 내려가지 않을까 경이로워하며 주시한다. 하지만 수경이 보기에 한국은 폴리우레탄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나라다. 수경의 친구 네 명이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피임보다 훨씬 어려운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이들인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수경 역시 정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성교육의 부실함일 수도 있고, 커플 내부의 권력 문제일 수도 있고,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인 콘텐츠에서 피임 과정을 편집·생략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여간 대한민국 성교육 실태는 참담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순간에 갖지 않도록, 수치심을 가지지 않아야 할 순간에 갖도록 잘못 가르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피임사전> 집필에 참여했던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이 환자에게 피임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의 성교육은 이런 식이다. 2015년 교육부가 2년 동안 6억원 이상의 연구비를 들여 내놓은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보자. ‘남성은 성에 대한 욕망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초등학교 1~2학년 교재)’ ‘이성 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초등학교 3~4학년 교사 지도안)’ ‘여성은 외모를, 남성은 경제력을 높여야 한다(초등 5~6학년 교재)’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는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등학교 교재)’. 이런 내용들은 성교육의 내용이 의학적으로 정확해야 하며, 문화적으로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미국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충분히 ‘불법’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좋은 성교육은 피임 교육이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위와 같은 ‘눈 가리고 아웅’식 교육만 반복된다.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열다섯 살 무렵에 성생활을 시작한다고 가정하면 이후 적어도 40년 넘는 시간을 좋든 싫든 피임과 연관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문화적 분위기는 피임을 결국 ‘임신할 수 있는 여자의 몸’ 문제로 쉽게 환원한다.

성인도 피임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어째서 피임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연구 공동체 ‘건강과대안’의 문제의식도 거기에서 출발했다. 건강과대안의 젠더건강팀은 지난해 말 서울시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이하 <피임사전>)을 펴냈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피임법과 피임에 대한 일반 궁금증, 피임에 드는 가격 정보, 부작용은 물론 재생산권 논의까지 폭넓게 담았다.

ⓒ시사IN 신선영
건강과대안의 젠더건강팀이 제작한 <피임사전>.
인생을 운에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인 ‘자연주기법(생리주기로 가임기를 계산하는 방법)’을 여전히 믿는다면 이 책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생리주기를 체크해본 여성이라면 알겠지만, 한 달에 ‘안전하게’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날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물론 정자가 몸속에서 5일가량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그나마도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면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러니 피임에 대해 비협조적이고 함께 논의할 수 없는 파트너라면 <피임사전> 속에서 한 문장을 뽑아서 말해줄 수밖에 없다. “이 관계가 지속되는 게 좋을지 고민해보세요.”

파트너와 논의해 콘돔이냐 경구피임약이냐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는 ‘그나마 좋은 상황’이라면 <피임사전>이 안내하는 다양한 피임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 당연히 100% 성공률을 보이는 피임법은 없다. 효과가 높은 루프나 불임수술도 실패율을 보인다. 무엇보다 성 매개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피임법은 콘돔밖에 없다. 이 때문에 <피임사전>이 제안하는 방법도 ‘상호 피임(Dual protection)’이다. 가장 대중적인 방법인 콘돔을 기본값으로 두 가지 이상의 피임법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콘돔과 정관수술 정도가 남성이 할 수 있는 피임법의 전부라면 여성의 경우는 훨씬 더 다양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제일 잘 알려진 방법은 매일 복용하는 경구피임약(1개월 패키지당 가격 1만~3만원, 진료비 별도)이다. 3개월간 피임 효과를 보이는 피임 주사는 출산 직후 수유 중에도 사용할 수 있다(1회 주사 비용 6만~8만원). 성냥개비 크기의 플라스틱 기구를 팔꿈치 위쪽 지점에 삽입하는 임플라논은 3년간 피임 효과가 지속된다(1회당 시술 비용 30만~40만원). ‘미레나’나 ‘제이디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호르몬 루프는 5년(미레나) 혹은 3년(제이디스)간 피임 효과가 지속되며 각각 30만~40만원, 19만~25만원의 비용이 든다. 호르몬 루프와 비슷한 구리 루프는 골반 감염 가능성이 높아서 사람에 따라 권유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시술 비용이 8만~10만원으로 호르몬 루프에 비해 저렴하고 응급 피임이 필요할 때 시술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이 밖에도 영구적인 피임 방법으로 난관수술과 정관수술이 있다. 난관수술은 80만원, 정관수술은 30만~40만원의 비용이 든다.

남성용 경구피임약이나 피임주사 개발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의학 환경에서 여전히 여성이 선택하고 고민해야 하는 피임 방법이 더 많다는 건 아쉬운 지점이다. 여성용 경구피임약의 경우 많은 여성이 구역질과 구토를 경험하는데, 남성용 경구피임약은 바로 그 이유로 연구를 중단하기도 했다. 1961년 시작돼 1996년 종료된 한국의 가족계획사업도 남성 피임에 대해서는 ‘방관’에 가까웠다. 피임약과 기구의 국내 생산과 수입금지 조치를 풀면서 국가가 보급한 피임 수단은 소개된 바와 같이 압도적으로 여성용이 많다.

아이를 낳는 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엇보다 위에 소개한 각종 피임 방법은 현재 일절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피임을 하고 싶다면 최소 4000~5000원(콘돔 가격)에서 80만원(난관수술)까지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시술이나 수술 비용 외 진료비 역시 별도로 ‘비급여’ 항목에 들어간다. 임신이 진단된 순간부터만, 혹은 불임시술에 드는 비용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이 같은 정책은 국가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는 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전 세계 여러 나라는 건강권과 공중보건 정책의 일부로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피임법을 제공하려 노력 중이다. 미국은 이른바 ‘오바마 케어’를 통해 모든 보험사에 피임 관련 서비스를 별도의 비용 없이 제공하도록 했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피임약, 루프, 임플라논에 대해 최대 65%의 비용을 지원한다. 청소년을 위한 피임을 지원하는 나라는 훨씬 많다.

피임은 몸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임신과 출산을 조절하는 일이며, 욕망을 알아가는, 건강의 핵심 문제다. 피임의 가장 큰 목적은 성 매개 질환을 막고, 원치 않는 임신을 막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유엔과 세계보건기구는 임신, 출산, 성과 관련한 여성의 어떤 결정도 불법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피임사전>의 필자로 참여한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기본적인 인권과 건강권의 관점에서 피임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임을 단순히 ‘임신을 피한다’라는 도덕적 문제로 환원해서는 논의가 진전되지 않는다. 이른바 재생산권은 임신·출산의 여부, 시기, 빈도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포함한다. 만족스럽고 안전한 성생활을 누릴 권리까지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건강과대안 젠더건강팀은 <피임사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피임 정보에 대한 사람들의 ‘목마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청자 중에는 자녀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부모와, 교육용으로 쓰겠다는 교사의 비중이 높았다. 지원금으로 무료 배포할 수 있는 1000권은 사전 신청자가 몰려서 신청자 모두에게 보낼 수 없었다. 대신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PDF 파일을 내려받아 볼 수 있다(www.chs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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