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이 단독 입수한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2015년 7월27일자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추경예산 -예술계 비판 지원’(아래 사진 참조). ‘〈실장님〉’이라는 소제목 아래인 것으로 보아 당시 이병기 비서실장과의 논의 내용을 적은 듯하다.

 

블랙리스트 관련 안종범 전 수석의 메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지금, 이 메모 역시 정부가 비판적 성향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지원을 배제해왔다는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메모가 뜻하는 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추경예산’과 ‘예술계 비판 지원’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메모가 작성된 날로부터 사흘 뒤인 7월30일, 정부는 공연예술계에 300억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당시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한창이었다. 관객 수 감소와 공연 취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공연예술계를 돕는다는 취지 아래 추경예산을 편성한 것이다. 이 ‘공연예술계의 메르스 예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 티켓 원플러스원(1+1)’이라는 사업으로 집행됐다. 관객이 공연 티켓을 구매하면 국가 예산으로 한 장을 더 ‘쏘는’ 방식으로 공연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 전 수석의 메모 ‘추경예산-예술계 비판 지원’은 바로 이 1+1 사업에 관한 내용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거기에 왜 ‘비판’이 적혀 있을까? 추경예산으로 정부 비판적인 예술인들을 적극 지원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1+1 사업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매우 광범위했다. 지원 대상을 작품의 내용과 질로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8~12월 공연, 티켓 가격 5만원 이하, 좌석 100석 이하처럼 공연 시기·가격·규모 기준만 충족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게 설계해놓은 ‘네거티브’ 방식의 지원책이었다. 특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2014년 중순쯤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아마도 블랙리스트가 활발히 적용되고 있었을 2015년 여름의 안 전 수석 메모를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추경예산-예술계 정부 비판 세력에 지원되지 않도록 주의.’

 

ⓒ시사IN 이명익메르스 창궐로 공연예술계가 어려움을 겪자 정부는 300억원을 긴급 지원했다. 위는 방역업체 직원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소독 작업을 하는 모습.

 


실제 1+1 사업과 관련해 미심쩍은 일을 겪은 연극인들이 있다. 예술집단 페테의 백훈기 대표(연출가·극작가)는 2015년 8월 〈페다고지〉라는 연극을 준비하던 중 1+1 사업 공고를 보고 지원신청서를 냈다. 지원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춘 연극이라 서류만 잘 갖춰 내면 통과될 줄 알았고, 실제로 주변의 많은 연극인들이 급하게 쓴 지원서로도 지원 선정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백 대표의 〈페다고지〉는 지원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제껏 많은 지원사업 공모에서 심사를 통해 지원을 받기도 하고 탈락하기도 했다. 탈락했을 때 그 이유가 궁금해도 ‘내 작품이 부족하려니’ 하며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 취지와 자격 요건을 살펴보았을 때 ‘떨어지기가’ 매우 어려운 지원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우스갯소리로 “서류를 너무 꼼꼼하게 잘 써서 떨어진 게 아니냐”라고 할 정도로 남들보다 더 신경 써 지원서를 쓰기도 했다.

‘설마 했는데’ 구호성 사업에까지 손댔다

백 대표는 문체부와 함께 사업을 주관한 산하단체 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에 전화를 걸어 “혹시 서류가 누락된 거라도 있었는지” 물었다. 직원은 “없다”라고 답했다. 탈락 이유를 묻는 백 대표에게 직원은 “말해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주변에 이 일을 이야기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시국선언 같은 데 서명한 적이 있으면 정부 심사에서 떨어뜨리게 만들어놓은 명단 같은 게 있다더라….” 백 대표는 ‘설마’ 했다. “1+1 사업 같은 구호(救護)성 사업에까지 그렇게 꼼꼼하게 단체를 거르는 일을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말 백 대표는 언론에서 보도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설마’를 ‘혹시’로 바꾸었다. “그간 문화계 검열 의혹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1+1 사업에도 블랙리스트 명단 걸러내기가 작동했으리란 심증이 굳어진다”라고 말했다. 실제 문체부에서 1+1 사업 관련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 관계자는 당시 내부 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블랙리스트 적용을 가장 극악하게 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1+1이었다고 한다. 명단에 따르면 엄청나게 배제해야 하는데 그러면 도저히 예산을 다 쓸 수가 없었다. 밑에서 ‘다 거르고선 도저히 못 한다’고 반발도 하고 그래서 결국 완벽히 다 거르지는 못했다더라.”


이 관계자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문체부 공무원들은 처음 1+1 사업 예산으로 5억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300억원이 내려와서 깜짝 놀랐다더라.” 실제 1+1 사업에 관련된 의혹은 블랙리스트 적용만이 아니다. 이 사업이 대체 왜, 누구를 위해 시행되었는지 공연계 다수 인사들은 지금까지도 의아해하고 있다. 예산이 엄청난 데 비해 지원 방식이나 과정이 매우 허술하고 취지와는 달리 영세 극단이 받은 혜택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연극계 한 관계자는 “예매처를 한 군데로 지정해 예매수수료 10%를 몰아주는 것부터 시작해 표 사재기·할인 경쟁 등 편법 소지도 많아 ‘돈이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았다. 관련 공청회 자리에서 많은 이들이 문제 제기를 했는데도 그대로 밀고 나가더라”고 말했다.

실제 많은 예산이 우려대로 새나갔다. 일부 공연 단체에서 자신의 표를 사재기해 극단 대표 22명이 그해 가을 보조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대형 뮤지컬 기획사들은 10여만원짜리 표를 (1+1 지원사업 요건 상한선인) 5만원으로 깎아 팔아 정부 지원금을 끌어모았다. 당시 유기홍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1+1 사업 프리 오픈 기간, 전체 지원 대상의 19%에 불과한 뮤지컬이 지원액 57.5%를 독식했다.

문제가 지적되는데도 문체부는 2015년 10월 2차 추가 공모에서 표 값 상한선을 5만원에서 7만원으로 늘리고 객석 제한도 100석에서 200석으로 풀었다. 규모가 크고 대중적인 뮤지컬과 콘서트에 지원이 쏠리면서 창작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소규모 극단들은 지원 혜택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헐값 표와 무료 초대권이 남발되고 관객 쏠림 현상이 극에 달하던 2015년 하반기 공연 시장을 영세 극단 대표들은 ‘메르스’와 함께 ‘1+1’ 악재가 겹친 공연계 최악의 시기로 기억한다.

1+1 사업과 비슷한 맥락으로 의혹이 제기된 문체부 공연계 지원사업이 하나 더 있었다. 문예위의 ‘재대관 지원사업’이다. 중규모 공연장을 정부 예산으로 대관한 다음 그 공간을 어려운 공연 단체에 다시 저렴한 비용으로 지원(재대관)한다는 취지이다. 문예위는 이 사업 명목으로 서울 동숭동 동숭아트센터와 아트원씨어터 각 1~3관을 통째로 빌리는 데 2015년 22억5700만원을 지불했다.

영세 공연단체의 대관료를 지원하는 취지는 좋다. 그런데 그 대관 장소가 많고 많은 사설 공연장 가운데 왜 하필 동숭아트센터와 아트원씨어터냐는 것이 공연계의 오랜 의문이었다. 2015년 10월 도종환 의원실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사업이 시작된 2015년 3월부터 그해 9월까지 두 공연장 소속 극장 6곳의 대관 실적은 50%를 넘기지 못했다. 아예 1~3개월씩 대관 실적이 전무한 곳도 있었다. 결국 텅텅 빈 사설 극장의 영업 실적을 정부 예산이 채워준 꼴이다.

‘블랙’에서 아낀 예산 ‘화이트’에 퍼주다

1+1 사업이나 재대관 사업과 같은 정부의 ‘미스터리 지원사업’을 좇다 보면 특정 인물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와 손상원 이다엔터테인먼트 대표 등이 그러하다. 공연계의 한 관계자는 “1+1 사업의 최초 제안자가 이 두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박 대표는 당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이었고, 손 대표는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이었다. 재대관 지원사업 명목으로 문예위가 통째로 빌려 손쉽게 대관료 수익을 낸 아트원씨어터 2·3관은 당시 손 대표가 임대 운영하는 극장이기도 했다. “1+1 사업이나 재대관 지원사업 등 정부가 벌인 공연계 지원사업 혜택이 사실상 두 사람과 그들이 속한 단체로 거의 ‘몰빵’됐다”라는 게 공연계 다수 관계자의 이야기다. 문화계 사람들은 그들을 이번 정부 대표적인 ‘화이트리스트’라고 주장한다.

 

 

 

 

ⓒ시사IN 조남진박근혜 정부의 예술 검열을 비판하기 위해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예술행동의 일환으로 서울 광화문광장에 ‘블랙텐트’ 극장을 차렸다.


박 대표와 손 대표는 모두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 캠프에서 일했다. 박 대표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문화특보이자 ‘문화가 있는 삶’ 추진단장이었고, 손 대표는 ‘문화가 있는 삶’ 추진단 위원이었다. 정부 출범 후 두 사람 모두 문화융성위원과 문예위 심사위원 등으로 박근혜 정부의 문화 사업에 관여했으며 지난해 6월 손 대표는 국립정동극장 극장장으로, 박 대표는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으로 각각 임명됐다. 차은택씨가 앉아 국가 예산을 농락한 바로 그 자리다. 박 대표는 차씨가 벌인 사업의 불투명한 예산 집행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경질된 여명숙 전 본부장의 후임이다. 박 대통령의 취임식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던 박 대표는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최순실·차은택과의 친분이 구설에 오르자 지난해 11월 문화창조융합본부장직에서 사임했다.

의혹들에 대해 박 대표는 “최순실·차은택 두 사람과 전혀 친분이 없으며 1+1 등 정부 사업에 관여하거나 특혜받은 일도 없다”라고 말했다. “차 감독은 2015년 가을께 문화융성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처음 봤다”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는 일찍이 ‘차은택 예산’을 논할 때 박 대표를 함께 언급했다. 이른바 공연계에 ‘메르스 예산’이 떨어지기 열흘 전인 2015년 7월19일자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대통령(VIP) 지시 사항이 적혀 있다. ‘차 감독 예산 융합센~, 박명성 cross check’(맨 위쪽 사진 참조). 메일로 질문을 보냈지만 손 대표는 답변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결국 ‘화이트리스트’의 존재를 증명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서 빼앗은 돈을 화이트리스트에게 챙겨주기 위해 박근혜 정부는 부단히 노력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국정 농단 게이트의 핵심 ‘미르재단’이다.

지난 1월13일 최순실씨 3차 공판 때 검찰은 이와 관련한 증거를 일부 공개했다. 이날 검찰은 K스포츠와 미르재단 설립 이유와 관련해 ‘체육계(K스포츠재단)와 문화계(미르재단)에 좌파 인사가 너무 많아 정부에서 주도했다’는 취지가 담긴 안 전 수석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공개했다.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계를 관리하다 곳곳에서 잡음이 생기니 아예 ‘포지티브’ 전략을 택해 화이트리스트의 메세나인 미르재단을 기획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이념적 이해관계는 미르재단을 활용해 부를 축적하려는 최순실 개인의 사익과 절묘하게 만났다. 그 둘의 기괴한 앙상블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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