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살 청년, 딸 마틸다의 아빠, 영화 개봉을 앞둔 스타 배우가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2008년 1월22일, 히스 레저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사람들은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미셸 윌리엄스와의 이혼과 지나친 배역 몰입이 그를 자살로 이끌었다는 소문이 어느새 정설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히스 레저의 죽음은 여러 가지 처방약을 한꺼번에 복용해서 일어난 사고사이며, 그가 복용한 약물 중에 마약으로 의심할 만한 것은 없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무엇보다 쓸쓸히 세상을 등진 비운의 천재로 기억되기에는 그의 삶이 그렇게 외롭거나 어둡지 않았다.

히스 레저의 인생을 한 장면으로 표현한다면 부서지는 햇살을 받으며 파도를 타는 ‘서퍼’가 제격일 터다. 서핑을 즐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밝힌 바 있고, 서핑을 할 수 없는 촬영장에서는 스케이트보드를 지니고 다닐 만큼 히스 레저는 훌륭한 서퍼였다. 다가오는 파도를 피하지 않고 유쾌하게 맞서는 서퍼의 자세는 곧 삶을 대하는 히스 레저의 태도와도 닮아 있었다. 고향 퍼스에서 시드니로, 시드니에서 다시 미국으로, 히스 레저는 드라마와 영화를 가리지 않고 서서히 자신을 담금질해 나갔다. 정식으로 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현장이 곧 그의 학교였다.

이우일 그림

이 담대한 서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보란 듯이 그 파도를 넘어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패트릭(히스 레저)이 카타리나(줄리아 스타일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서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부르는 장면은 히스 레저의 매력을 할리우드에 알린 첫 작품이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학교 경비원을 피해 도망치면서 해사한 미소를 날리는 모습 덕분에 이후 엇비슷한 틴에이저 영화에 섭외 요청이 이어졌다. 그러나 히스 레저는 유명세에 손쉽게 올라탈 기회를 마다한 채 자신의 몸을 던질 새로운 파도를 기다렸다.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에서 멜 깁슨의 아들 역할로 주목을 받더니, 뒤이어 〈기사 윌리엄〉에서는 기사로 신분을 위장한 윌리엄 역할로 원톱 주연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다시 몇 작품을 거쳐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를 통해 그의 연기가 만개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히스 레저에 앞서 여러 배우들이 섭외 물망에 올랐지만 이내 무산되었다. 어쩌면 에니스가 히스 레저를 만나려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 연인 잭(제이크 질렌할)과의 이별 후 혼자 슬픔을 삭여내는 연기는 에니스 자체, 혹은 그 이상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이안 감독과 원작 소설가 애니 프루 모두를 만족시켰다.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서퍼를 길러낼 바다가 되다

〈다크 나이트〉의 악당 조커 역할은 그가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큰 파도였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부터 히스 레저는 조커 배역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과거 잭 니컬슨이 선보인 조커의 아우라가 너무나 독보적이었기에 히스 레저의 캐스팅을 둘러싼 우려도 컸다. 늘 현재를 살기 때문에 한 번도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던 히스 레저는 조커의 시점에서 일기를 쓰고 조커를 다룬 작품들을 독파하며 목소리, 걸음걸이, 표정을 상상했다. 그리고 역대 어느 조커와도 같지 않은 독보적인 절대악 캐릭터를 창조했다. “Why so serious?”라는 대사 한 줄에 히스 레저는 혼돈·살인·배신을 즐기는 조커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

자신이 창조한 조커에 쏟아지는 찬사를 들어보기도 전에 그는 너무나 높은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최고의 순간을 앞두었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지만 히스 레저는 자신을 추억하는 이들과 함께 이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2008년 6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히스 레저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매년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배우를 선정해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항공권, 연기 수업, 멘토링까지 아낌없이 지원한다. 휼륭했던 ‘서퍼’ 히스 레저는 이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서퍼를 길러낼 바다가 되어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았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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