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문구의 모험〉을 쓴 제임스 워드가 말했다. “연필깎이는 문자 그대로 연필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을 죽이기도 한다. 내가 알기로는 결혼도 그렇다.” 숨은 연필심 끄집어내어 연필이 제 쓸모를 갖게 만드는 도구이지만, 갈수록 연필을 깎아내다가 결국 사라지게 만드는 연필깎이. 결혼이라는 제도의 본질도 그러하다는 얘기다. 많은 남녀가 결혼 덕분에 빛을 보지만 또한 결혼 때문에 빛을 잃는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존(이선 호크)은 차라리 몽당연필이다. 오랜 결혼 생활로 깎이고 깎인 자유와 열정이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존의 운명을 틀어쥔 연필깎이 속 유난히 단호하고 날카로운 칼날은 바로 아내 조젯(줄리언 무어)이다. 같은 교수이지만 존보다 잘나가는 교수. 그런 아내를 향한 사랑은 식었고, 두 아이 아빠라는 의무만 남았다. 이렇게 늙어가는 자신이 괜히 초라하다. 이대로 삶이 끝나버릴까 봐 자꾸 초조하다.


그때 동료 교수 매기(그레타 거윅)와 마주친다. 정 많고 웃음 많고 이해심까지 많은 여자. 모든 면이 조젯과 다르다. 매기 앞에서 존은 작아지지 않는다. 존 앞에서 매기가 잘난 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존의 꿈을 건성으로 응원하던 조젯이었다. 존이 건넨 소설 초고를 꼼꼼히 읽고 정말 재미있다며 칭찬하는 매기다.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시작된 몽당연필의 일탈. 조젯에게서 벗어나려는 존의 반란. 영화 〈매기스 플랜〉은 일단 그렇게 운을 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존이 매기와 잔 다음. 조젯과 이혼하고 매기와 재혼한 다음. 귀여운 딸 하나 낳고 살면서 존이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에 매달린 다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결혼 생활이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존에게만, 이 지독히도 이기적인 남자에게만, 그랬다.

모든 장면들이 좋았다

이제 연필깎이에 갇힌 사람은 매기다. 하루하루 깎여나가는 건 매기의 미래뿐이다. “살림도 내가 하고 돈도 내가 번다니까.” 친구에게 한탄만 하던 매기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묘안을 짜낸다. 그렇게 시작된 매기의 반격. 이 여자의 기상천외한 승부수. 그때부터 영화 〈매기스 플랜〉의 이야기가 한층 더 흥미진진해진다.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이자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아내. 레베카 밀러는 늘 그렇게 불렸다.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2009)처럼 자신이 직접 각본 쓰고 연출한 영화마다 빠짐없이 호평을 받았는데도 계속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로만 기억되었다. 다행히 〈매기스 플랜〉을 본 관객에게는 아버지의 명성도 남편의 인기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를 쓰고 연출한 감독’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미술, 의상, 촬영, 음악 할 것 없이 영화의 모든 면이 훌륭하지만 특히 캐릭터와 캐스팅이 탁월하다. 〈프란시스 하〉(2012)에서 예쁘게 반짝이던 바로 그 배우, 그레타 거윅이 연기하지 않는 매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스틸 앨리스〉(2014)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줄리언 무어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마다 웃음을 참기 힘들다. 〈비포 선라이즈〉(1995)로 시작한 ‘비포 시리즈’ 3부작의 주인공 이선 호크 덕분에, ‘한없이 이기적인 불륜남’ 존이 ‘끝내 미워할 수 없는 남자’로 남을 수 있었다.

최선의 각본이 최적의 배우를 만나 최상의 코미디로 완성된 〈매기스 플랜〉. 영화 배경은 줄곧 뉴욕의 겨울이지만 그걸 보는 나의 마음은 내내 봄날이었다. 참 예쁘고 따뜻했다. 매기가 늘 쓰고 다니는 그 새파란 털모자처럼.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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