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폭탄 테러〉
탈랄 아사드 지음
김정아 옮김
창비 펴냄

모든 이분법이 무너진 지 오래인 우리 세기에 가장 중대한 윤리는 테러에 관한 것이다. 테러의 목표는 군인도 군사시설도 아닌, 아무런 방어 수단 없는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이다. 민간인은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느닷없이 도륙당한다. 특히 아이들은 무기를 들 체력도 없는 데다가, 테러범으로 하여금 복수나 저항을 결심하도록 만든 그 어떤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에 가담한 바가 없다. 테러는 항상 야만의 땅에서 준비되며, 테러리스트는 이성이 닿지 않는 전근대적 시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테러를 설명하는 진실일까?

테러는 야만이나 전근대와 상관이 없다. 오히려 테러는 철저한 문명의 산물이다. 첫 번째 이유로 꼽을 것은 기술(무기)의 발달이다. 총포가 발명되기 전에는 근력의 한계가 곧 무기의 한계였다. 적군의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 칼질을 해댔던 중세 시대에는 전방과 후방이 구분되어 있었다(여성·노인·아이는 후방). 전쟁의 승패가 군대끼리의 교전으로 판가름 나던 절대전은 총포와 공중폭격이 등장하면서 적국의 모든 역량을 타격하는 총력전이 된다. 발달된 무기가 대인 살상(man-killing)을 넘어 대물 파괴(thing-killing)를 가능케 하면서, 미국 정부가 ‘부수적 피해’라고 완곡하게 표현하는 민간인 피해가 생겨났다. 테러리스트에 의한 대죄(민간인 살상)는 군사작전이 저지른 대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테러가 문명의 산물인 두 번째 이유는 정치제도(민주주의)의 발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은 독일의 대표 도시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독일군 주력은 전선에 있지 도시에 죽치고 있을 턱이 없었으니, 연합군의 융단폭격은 명백히 비전투원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때 대죄를 짓는 연합군 공군 조종사의 양심을 무마해준 기제는, 독일 국민이 선거를 통해 히틀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찰스 타운센드는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한겨레출판, 2010)에 이렇게 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부분의 독일 국민이 나치 정권의 존재와 악행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간주했다면,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가 같은 논리를 차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지영 그림

왕정 시대에는 왕이 항복하면 전쟁이 끝나고 왕국도 사라졌으나, 낱낱의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인 근대국가는 피점령국의 국민 모두를 파르티잔(=레지스탕스)으로 만든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국주의 시대의 공법은 피점령국의 저항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국제 교전 규칙을 정했다. 예컨대 군인임을 식별할 수 있는 군복을 착용하지 않은 병사는 간첩이나 범죄인으로 취급되어 포로나 부상병으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정규군이 괴멸한 상태에서 계속 저항을 하려는 패잔병은 당장 자신의 군복부터 벗어던지고 사복으로 변복해야 하는데, 점령군은 그것이 불법이란다. 파르티잔이 자신의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반면 테러리스트는 장소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파르티잔과 다른 것은 지구화 시대에 맞는 높은 이동성일 뿐, 군복 없는 군인이라고 해야 맞다.

테러보다 더 무겁게 우리 세기의 윤리를 심문하는 것은 자살 폭탄 테러다. 서구인들은 자살 폭탄 테러를 광신(狂信)으로 간주하면서, 정교분리의 서구와 신정일치의 이슬람권을 비교한다. 탈랄 아사드의 〈자살 폭탄 테러〉(창비, 2016)는 어느 종교권에서건 자살 테러는 “테러범이 자기 나라 땅이라고 생각하는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점령국의 병력을 철수시킨다는 구체화된 세속적·전략적 목표”에서 이루어지지, “종교가 자살 테러 작전의 근본적인 원인인 경우는 없다”라고 반박한다.

‘이해’가 ‘경악’을 못 누르면 테러의 끝도 없다

서구는 자살 폭탄 테러가 신정일치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슬람의 전근대성을 입증한다고 말하지만, 근대는 완벽한 정교분리를 실행한 적이 없다.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 때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해야 하며, 9·11 때 부시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학적 용어와 서사에 의지했다. 또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오늘도 기독교 정당을 시도하고 있다. 찰스 타운센드가 말했듯이 정치와 종교의 “경계는 상호 침투적 성격”이 강하다. 더욱이 프랑스 혁명 이후, 종교적 열정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애국적 열정이 종교를 대신했다는 것도 저 잘난 근대의 낙후성을 보여준다.

서구인들이 자살 폭탄 테러에 분노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죄인을 처벌할 수 없는 무기력이다. 근대의 형법은 죄와 벌이라는 ‘주고받기’에 근거한다. 그런데 자살 폭탄범은 죄와 벌이라는 근대인들에게 익숙한 법 감정과 형법 원리를 조롱한다. 하지만 탈랄 아사드의 말을 들어보면, 서구인들의 이런 법 감정 또한 위선적이기 짝이 없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유럽인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빼고 한 명도 없고 전부 아프리카인이 아니면 아시아인뿐인 것은 왜겠습니까? 조지 W. 부시,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 토니 블레어-수십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수백만명을 난민으로 전락시키고 나라를 통째로 초토화시킨 주범들-가 인권침해로 기소당하는 일 없이 무사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자살 폭탄 테러〉의 핵심에 있는 개념은 ‘경악(horror)’이다. 서구인들은 자살 폭탄 테러 현장에 흩어진 피해자의 머리와 팔다리, 흥건한 피, 부상자의 울부짖음을 보고 경악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데 경악은 느낌의 상태일 뿐, 하나의 사태에 대한 이해(under- standing)에 가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경악은 이해하려는 과정이나 노력을 생략한 채 곧바로 ‘무슬림은 광신도(혹은 야만인)’로 비약한다. 이처럼 자살 폭탄 테러를 종교적 동기와 직접 연동할 때마다 지하디즘이 “미국의 침략 및 주둔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은폐된다. 이런 생략과 비약은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선전과 서구 언론의 대중 추수가 조성한 것이기도 하지만, 경악이라는 개념과 결부된 근대인의 자기정체성 구성과 더 상관 깊다. 전근대인들이 정신과 육체 가운데 전자에 자기정체성을 두었다면 근대인들은 후자에 더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근대인은 자기정체성(육체)을 자진해서 파괴하는 자살 폭탄 테러범에 경악하며, 자신의 육체를 자진해서 망가뜨린 자폭자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괴물이 된다. 하지만 가령, 전근대적 자기정체성(정신)을 간직했던 구한말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라면 이들의 자폭에 경악하기보다 이해가 앞섰을 것이다. 이해가 경악을 억누르지 못하면 테러의 끝도 없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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