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84)은 1933년에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올해 등단 59주년을 맞았다. 한국 근현대 문학의 산증인이다. 2002년 이후 매년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세계 50여 나라에 그의 시가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이 원로 시인도 포함되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의 이름 옆에는 ‘문재인 지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1월13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 신년 하례회를 마치고 나오던 고은 시인을 만났다. 이날 그는 제4회 로마재단 국제시인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한국에선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고, 해외에서는 국제적인 문학상을 받았다.
이번이 아마 다섯 번째 타는 국제 문학상 같다. 지금 심정으로는 조용히 나가서 상만 타려고 한다. 내 생애 자체가 현대사와 같이 살아와서 사실 내 심신에는 백 년도 더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시사IN 윤무영
어떤 고민인가?
요즘 밤에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데, 낮에 그렇게 혐오하고 경멸하고 저주하던 이 정권의 실체가 밤에는 문득 “아~ 나의 축복이구나!” 이렇게 여길 때도 있다. 역설이다. 박근혜 정권 4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우리 역사의 축복이라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정말 수준 없고, 교활하고, 염치가 없는, 정말 자기가 악인인지도 모르고 마음껏 저지르던 죄악이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앞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경건한 이유를 우리 앞에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들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구역질이 났다. 블랙리스트 작성자와 집행자들이야말로 역사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될 것이다. 사실 블랙리스트가 새삼스럽고 낯설지는 않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 군사정권 때 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의 문제다. 국가는 이런 야비한 수단을 자기 정치 형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직도 군부 정권, 신군부 정권 혹은 그 이후 여러 수구 정권들이 하던 행태를 진화시켜 문화인들의 활동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수준 미달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또 그동안 일각에서 말하는 산업화라든지 민주화라든지 이런 공허한 언어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아직도 전근대에 살고 있구나, 이런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블랙리스트 문제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까지 연관해서 보는 이유는?
그동안 산업화가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든지 산업화가 이뤄져서 그다음에 민주화가 가능했다고 하는 주장이 팽배했다. 박정희가 있고 전두환이 있어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가 있었다는 이런 선후 관계로 얘기하는데 나는 아주 잘못된 논리라 생각한다. 산업화 자체가 일종의 근대의 자아를 발전시키는 행위라고 하지만, 근대 자아란 뭔가? 민주주의다. 두 가지는 동시에 출발한다. 산업화의 가능성은 ‘나 자신’이라고 하는 활동 주체가 생겨서 시작하는 것이고, 이게 곧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이걸 분명히 말하고 싶다. 동시성에 서열을 매겨서 ‘선(先)산업화 후(後)민주화’라는 잘못된 도식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한손에는 블랙리스트, 다른 한손에는 ‘문화융성’을 기치로 들었는데.
그것은 정말 문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언어다. 그런 미명하에 하는 짓이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같은 걸 작성해 세상을 아주 우습게 만들었다. 우리 문화판은 지난 100년 동안 모진 비바람과 풍상을 견디며 안팎의 시련을 이겨내고 가꿔온 아주 ‘엄숙한’ 문화다. 정권의 돈 몇 푼으로 문화를 함부로 좌우하고 관리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유치원 수준도 안 되는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창조경제니 문화융성이니 하는 허울이 최순실씨 부정 축재를 목표로 한 대기업 착취가 아니고 무엇인가. ‘창조’와 ‘문화’라는 고귀한 낱말을 어떻게 치사하게 국정을 농락하는 데 써먹을 수 있나. 참으로 우스꽝스럽고도 슬프다.

ⓒ연합뉴스1989년 남북 작가 회담 예비회의에 참석하려던 고은 시인(가운데)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
유신 시대에 겪었던 문화통제 정책과 비교한다면.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문예진흥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나한테 지원금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늘 거절했다. 이걸 받으면 나중에 중앙정보부에서 북한 자금 받았다고 조작할 수도 있던 시절이었다. 외국에서 주는 지원금도 거절했다. 무슨 서독 교회, 미국 지원금, 일본 지원금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 돈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문인협회나 어용 단체에서 ‘어느 문인이 박정희한테, 전두환한테 몇백만원 받았다더라’ 이런 말을 많이 퍼트렸다. 이런 세상인데 내가 정부로부터 한 푼을 받아봐라. 500원 받으면 500만원 받은 걸로 나온다. 그래서 받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나 혼자가 아닌 많은 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마땅히 지원을 받아야 한다. 원고료 수입이나 대학교수 봉급이 있는 나와 달리 수많은 작가들에겐 그런 게 없다. 문인들에게 정부 차원에서 문화와 복지로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금을 받아서 집행하는 정부의 의무다. 정부 시혜가 아니다. 지원받은 작가들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 된다. 문단에서도 마침 그렇게 자각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의도를 알고 지원을 딱 끊어버린 것이다. 이게 블랙리스트의 본질이다.

박근혜 게이트, 또 블랙리스트 파문 등을 보며 ‘87년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1987년 6월 항쟁은 4·19 혁명을 계승했다. 그때 만든 게 이른바 30년 동안 이어진 87년 체제였다. 그때는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 수준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선출된 대통령에게 무한한 권력을 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권력을 돌다리도 두들겨보면서 건너듯 아주 조심스럽게 썼다. 어떤 점에서는 자기 활로를 개척하는 게 조금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개혁) 겁을 낸 것 같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을 피워보지 못하고 임기가 끝났다. 여러 세력들이 대립하면서 노무현을 무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직하고 국민에게 순정을 보였지만 그가 이룬 것은 참 무의미한 면도 있다. 그러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마저 다 사라졌다. 이게 ‘87년 체제’의 결말이다.

ⓒDaum 갈무리고은 시인은 부인 이상화씨(오른쪽)가 있어 문학이 가능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87년 체제를 종식시키자는 개헌론이 나오는데.
우선 박근혜 정권 퇴진이 중요하다. 선(先)퇴진이다. 현 시국에서 헌법재판소에만 모든 걸 맡길 수 없다. 또 특검도 유한하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 기간 안에 수사를 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전부 해결 난망의 현실 앞에 서 있다.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킨 뒤에 개헌을 하든 뭘 하든 해야 한다.

촛불시위는 어떻게 보았나?
나는 도저히 이런 시(詩)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촛불은 가장 우수한 혁명이다. 그리고 가장 세련된 문화이다. 촛불은 예술의 대향연이다. 미학과 윤리가 동의어가 된 현장이다. 우리는 이제 광장의 시민이 되었다. 이 촛불의 광장은 세계사적으로도 명예로 공인되고 기억될 것이다. 현실의 난제 앞에서 촛불은 꽃이다. 이 꽃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 명예혁명 그리고 평화혁명으로서의 촛불은 고도의 정치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촛불시위를 그렇게 예찬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동안 개개인이 혼자만 살겠다는 시장 논리에 급급했다. 인문학이 대학에서 망한 이유다. 사라진 인문의 정신이 회복된 게 바로 촛불이다. 촛불은 고도의 정치적인 성취이자 고도의 문화적인 성취다. 정치와 문화를 동의어로 만든 게 이번 촛불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현대 문학과 시를 지켜온 산증인이다.
광복 후 등단하면서 1910년대 근대 시문학을 주도한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만났다. 문하생으로 출입하면서 차도 마시고 어울렸다. 나중에 친일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둘과는 교류를 접었다. 6·25 전쟁 직후 춘원 이광수가 북에 납치됐다. 그 뒤 이광수 부인하고 친했다. 이광수 부인이 산부인과를 운영했는데 1950년대 후반까지 내가 찾아가면 춘원이 쓰던, 앉은뱅이책상 등이 그대로 있는 방에 나를 앉히고 밥을 차려주곤 했다. 그러니까 한국 현대문학이 시작된 1910년대 문인들과 같이 호흡했다. 1920년대 시인들 가운데 술독에 빠져 살던 변영로, 담배를 많이 피워 꽁초라 불리던 오상순, 이런 문인들이 있는데, 나하고 늘 같이 있으면서 그들이 싸우면 후배인 내가 끼어들어 싸움을 말리기도 했다. 또 1930년대 등단한 시인인 김동리, 서정주 이런 분들과도 어울렸으니 현대 시 100년을 늘 호흡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문자와 기록으로서 과거를 아는 게 아니라 우리 현대문학사가 내 몸속에 다 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문학에서 하나의 기억의 생명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시인이 되어 주로 서사시를 썼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교육받던 나는 해방 직후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가 국어 교과서에서 한글로 된 시를 처음 접했다. 거기에 이육사 시인의 ‘광야’가 실렸다. 그런데 김소월이나 한용운 시인의 서정시를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다. 내가 만나지 못한 공간, 광야는 지평선이었다. 거기에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생명체가 생기기 이전의 태고 태초, 거대한 시간을 담았다. 완전히 무한한 큰 대지가 있고 거기에 또 초인이 시에 나온다. 인간을 넘는 대인간인 초인, 그것도 그냥 초인이 아니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다.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시가 무서워졌다. 그다음에 만난 책이 한하운(한센병 환자로 ‘보리피리’ 시를 내며 한센병 환자의 자활운동에 나섰다) 시집이다. 우연히 길에서 주운 그 책을 집에 가져가 밤새 읽고 울면서 감명을 받았다. 하루 자고 나면 눈썹이 떨어져 나가고, 썩은 발가락이 하나 없어지고… 나도 이런 시를 쓸 것을 맹세하고 엉엉 울었다. 그러다 몇 달 뒤 6·25가 났다. 시에 대한 꿈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됐다.

그동안 쓴 시의 원초적 ‘고향’을 꼽는다면.
나는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6·25 때 내 또래는 남이나 북이나 절반이 죽었다. 절반이 살아남은 우리는 절반의 세대다.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 죽은 내 또래에 대한 원죄, 가책이 있다. 너희들이 못 산 삶을 내가 대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사명감도 있다. 내 고향이 폐허가 됐고, 내 마음도 폐허가 되었다. 폐허라는 건 부모도 의미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 폐허 속에서 우리 삶이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내 문학이 있었으니까, 이런 폐허가 내 시의 고향이다.

폐허에서 민족 문학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60년대까지 폐허, 죽음, 허무 이런 거에 갇혀 있느라 현실에서 비켜서 누에가 고치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지냈다. 통행금지 땜에 술 먹다가 집에 못 들어가면 부근 여관에 가야 하는데 돈 없으면 사정해서 술집에서 잤다. 술집 탁자 위에서 자다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면 아프고 다치기도 했다. 하루는 신문 쪼가리, 반찬 찌꺼기가 널려 있는 신문을 보니까 며칠 전에 한 노동자가 분신했다고 나와 있더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이었다. 늘 죽음만을 생각하던 나는 이 죽음에 꽂혔다. 이런 죽음이 어째서 있는가. 민족 현실, 사회 현실에 눈을 떴다. 그래서 나는 ‘아, 내가 무서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세상을 보는 눈이 극적으로 반전되면서 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만 아니라 서울대 법대생이던 조영래도 그랬다. 그때 다 깨달았다. 죽을 때 나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저렇게 죽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문인들을 만나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다.

이후 군사정권에 모진 고초를 겪었다.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박정희의 유신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혼란기에 나는 민주화운동의 중심부에 있었다. 전국의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 상황과 늘 관련되어 있었다. 신군부 정권이 ‘내란 음모’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나를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 특별 감방에 수감했다. 당시 김대중, 문익환 목사 등 나를 포함해 그 특별 감방에 갇힌 다섯 사람은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절망적인 수인의 몸으로 오로지 ‘내가 앞으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이런 것을 써야겠다’며 시를 구상하는 것이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나라 잃었던 시절, 나라를 찾기 위해 무장투쟁·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서사시 〈백두산〉, 내가 직접 만난 사람뿐 아니라 만나지 않은 사람과 역사 속의 사람, 역사 속에 있을 법한 이름 없는 사람 등을 망라해서 거대한 우리 겨레의 지도를 서사화하는 〈만인보〉도 그때 구상한 것이다.

석방된 후 영문학자 이상화 교수와 결혼하고 안성에 터를 잡았는데.
1983년에 아내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1980년대 후반에 죽었을 것이다. 당시 아내가 중앙대학교에 재직했는데 전두환 정권이 나를 감시할 때라 아내를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했다. 그때 중앙대에 출입하던 안기부 직원이 반대하고 나섰다. “고은을 행복하게 해서 거리에 안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이 결혼이 그가 세상에 안 나오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안기부 덕에 아내는 교수직을 유지하게 됐고 나와도 결혼했다.

고은 시인에게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
내 문학 대부분은 아내가 있기에 가능했다. 〈만인보〉 〈백두산〉 등은 결혼 이후에 안성 생활 30년 동안 이뤄진 것이다. 내가 1980년대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내는 내 문학의 동반자였다. 아내가 내 시를 먼저 읽고 잘못을 지적하면 내가 고치기도 한다. 내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전부 아내가 한다. 아내는 지금까지 자기 생을 영위하지 못하고 나의 세계에 파묻혀 살아서 내가 죄의식이 강하다. 영문학자니까 할 게 많은데 내 일 때문에 하나도 못 했다. 아마 앞으로 향후 2~3년 안으로 아내를 어떻게 해방시킬까 이게 내 생의 중요 과제다.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올랐는데.
노벨상은 주는 사람들의 의도를 모르니까, 나로서는 아는 게 없어서 대답할 것도 없다. 내 시는 세계 50개국에 소개되었다. 그중 제일 눈물겨운 게 지구상에서 고난과 핍박받는 민족인 쿠르드족과 타밀족에게 그들의 언어로 번역돼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로 번역된 것보다, 눈물겨운 민족이 내 시를 찾고 있다는 게 과분한 축복이다. 스웨덴에서는 교육부에서 〈만인보〉를 현대 고전 시리즈 선택과목으로 선정해 대학에서 쓰고 있다. 중국에서도 내 시를 좋아해 인터뷰도 많이 하고, 나를 당 기관지 〈인민일보〉 필진으로 초빙했는데 지난해 사드 사태 이후 끊겼다. 내가 사드 지지자도 아닌데.

한반도 주변 외교 정세 속에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나?
지금 우리는 대위기 속에 들어섰다.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숙명은 자아를 방어하는 난제를 위기 때마다 심화시켰다. 지난해 사드 배치 발표로 한국은 중국의 응징을 받기 시작했다. 이 보복의 정도는 앞으로 한국 경제와 문화 전반에 심대한 악영향을 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어떤 지혜와 국가 전략 없이 기존의 대미 의존 정책을 따랐다. 여기에 일본도 안이하게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 내부적으로 국가 파국이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탄핵이 급선무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 민족, 전 시민적 의지를 결집시켜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박근혜의 몰락은 우리 미래의 가능성을 앞당겼다.

끝으로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누구의 지도를 받아 이제까지 살아온 적이 없듯이 청년들은 지도할 대상이 아니다. 내 동행자다. 촛불 민심은 젊은이, 아이, 노인,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 동행하고 있는 동시대인 아닌가. 나는 그들의 교사가 될 수 없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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