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거악(巨惡)이다. 노조를 파괴하고 관료를 매수하며 검찰을 조종한다. 하청 중소기업에 납품가 인하를 강요하고 심지어 중소기업이 힘겹게 개발한 기술을 탈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순환출자를 통해, 계열사 전체의 주식 수에 비하면 5% 내외에 불과한 지분으로 그룹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비상장 자회사 설립이나 일감 몰아주기로 자본시장을 농락해왔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빵 가게나 레스토랑, 맥줏집 등 소(小)자영업자들의 사업 영역에 뛰어드는 등 골목상권 장악에 나섰다. 이런 재벌에게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인정해주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노는 분노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선입견에 휘둘려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면, ‘재벌 개혁’이 자칫 재앙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예컨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은 이유를 재벌 대기업 탓으로 돌리는 견해가 팽배해 있다. 대기업이 하청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를 깎아 착취한 돈으로 자사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하청 중소기업은 그만큼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해당 업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는 계속 커진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하나의 잘 짜인 ‘스토리’일 뿐이다. 무엇보다 현실의 통계수치로 확인되지 않는다. 국내 최대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데이터의 실제 통계수치를 통해 검증해보자.
 

ⓒ시사IN 신선영경남 거제시 대형 조선소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래 〈그림 1〉의 ‘1차 공급 기업’과 ‘2차 공급 기업’은 이른바 대기업의 협력업체이다. 1차 공급 기업은 2차 공급 기업으로부터 납품받은 부품을 다시 가공한 뒤 대기업에 공급한다. 대기업은 여러 1차 공급 기업으로부터 납품받은 부품들을 조립해서 완성재를 만든 뒤 시장에 판매한다. 그런데 시장에는 대기업과 관련 없는 중소기업도 있다. 대기업과 관계없이 최종 완성재를 만들어 곧바로 소비자들에게 파는 ‘독자적 중소업체’들이다. 만약 위의 ‘대기업의 착취로 협력업체의 임금이 낮다’는 스토리가 옳다면, 대기업 협력 중소업체의 임금 수준은 (착취당하지 않는) 독자적 중소업체의 그것보다 낮아야 한다. 그런데 2006~2013년 임금 추이를 나타낸 〈그림 1〉을 보면,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기업 협력업체들의 임금이 독자적 중소업체의 임금보다 오히려 현격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저임금 원인을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이라고 떠드는 ‘부두 경제학’은 사실을 왜곡해도 이만저만 비틀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 협력업체가 독자적 중소기업보다 고임금

그렇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는 무엇 때문인가? 노동생산성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중소기업(협력업체와 독자적 중소업체를 모두 포괄)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노동자들보다 ‘능력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능력의 노동자라 해도 주판과 전자계산기 중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계산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즉, 대기업 노동자들은 중소기업 노동자에 비해 훨씬 비싸고 성능 좋은 설비(자본재)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높고 임금도 많이 받는 것이다.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대기업 노동자들의 ‘자본집약도’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자본집약도가 높은 이유는 투자를 많이 해서다. 임금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용을 줄이면서 고정자본 투자를 급격히 늘려왔다. 자동화 혹은 ‘노동절약적 기술 진보’라고도 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 대기업들은 연구개발 부문에 대규모 자금을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이를 통해 다른 선진국 기업들보다 독창적인 제품을 개발하면, 시장에서 평가받는 ‘부가가치 몫’이 크게 높아진다. 해당 대기업의 노동생산성 역시 그만큼 높아진다.

이 같은 대기업들의 공격적 투자는 한국 경제 전반에도 대체로 긍정적 효과를 미친 것으로 보인다.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면 실질임금 역시 오르는 경향이 있다. 아래 〈그림 2〉는 2000~2015년 한국·영국·일본·이탈리아의 실질임금 추이다. 영국·일본·이탈리아 등의 실질임금은 정체하거나 심지어 크게 하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한국의 실질임금은 상승 추세를 대체로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이탈리아 및 일본과의 실질임금 격차를 크게 줄였다. 실제로 한국은 2000년 이후 OECD에서 가장 급속한 노동생산성 및 실질임금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7~2014년, OECD 국가 중 한국의 ‘중위소득 상승률’은 전체 4위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 국가 중에서 중위소득 상승률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이스라엘밖에 없었다.
 

한국 경제에서 이른바 재벌 대기업의 비중은 생산성 변동 추이에서도 나타난다. 대기업들이 모여 있는 제조업이 다른 부문의 생산성 상승을 추동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 3〉을 보면, 최근 10년(2005~ 2015년) 동안 한국의 노동생산성 상승에 여러 산업(제조업·도소매 유통업·금융업·지식정보 서비스업)이 각각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알 수 있다. 제조업의 생산성 상승률 기여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유통업의 기여도도 꽤 높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제조업 부문의 변동을 좇아가는 경향이 있다. 즉, 제조업 부문의 생산성이 증가(하락)하면 그 파생효과에 따라 유통업 생산성도 상승(하락)하면서 전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낮추는) 것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제조업 부문이 다른 산업의 생산성 상승을 추동하며 경기를 이끄는 지역은 한국과 독일 등 제조업 경쟁력이 높은 나라들뿐이다. 수출을 주도하는 제조업 부문 선도 기업들의 공격적 투자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다.

재벌의 단점과 장점 파악하고 개혁안 만들어야

재벌 대기업들이 납품 단가 인하, 기술 탈취 등으로 중소기업의 수익성 개선을 억제해온 것은 사실이다.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이 올라가면 여지없이 납품 단가를 낮추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중소기업들은 호황기에도 영업이익률(영업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비율, 판매 마진)을 높이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중소기업의 투자 의욕이 꺾인다. 적극적으로 투자해봤자 영업이익은 그대로이므로 투자할 필요가 없다. 이러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 격차가 확대되어왔다. 다만 대기업들이 경기 변동에 따라 협력업체의 사정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징후는 나타난다. 한국기업데이터의 관련 자료들에 따르면, 2007~2013년,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은 7%→4%→6.5%→3% 등으로 심하게 요동치는 반면 협력업체의 그것은 5.5~6%로 일정하다. 이는 경기 하강의 충격을 대기업이 흡수해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호황 때 납품 단가를 올려주지 않는 대신 불황기에 납품 단가를 떨어뜨려 하청기업을 곤경에 빠뜨리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다. 수출 주도 재벌 대기업을 비판하더라도 이 정도의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폐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대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면서 돈놀이나 하는 유럽·미국 기업들만큼 ‘자본의 사회적 역할’에 무심한지는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사회적 역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연 ‘투자’다. 재벌 가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계열사의 확장을 통해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단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나름의 장기적·전략적 시야 속에서 투자를 통해 기업을 키우려 한다. 한국 재벌 집단의 독특한 측면이다.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 재벌이 착한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골목상권 침해 등 재벌의 악행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재벌을 규제한답시고 그나마 사회적 선순환을 창출한 부분까지 두들기며 변죽만 울릴 필요는 없다. 이런 행위는 진보 성향 시민들의 심리적 만족감을 높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서민·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는 힘들다. 재벌의 단점은 물론 장점까지도 총체적으로 점검해서 개혁 대안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기자명 남종석 (부산대 경제학과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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