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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국민이 죽어도 알아사드는 잘 잔다

하페즈 알아사드 전 시리아 대통령의 차남 바샤르 알아사드는 평범한 안과 의사였다. 아버지로부터 대권을 이어받은 그는 피의 독재자로 거듭났다. 내전 기간에 시리아인 40만명이 희생되었다.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1월 19일 목요일 제4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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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새해 벽두부터 세계는 테러 뉴스를 들어야 했다. 1월1일 터키 이스탄불 나이트클럽 총기 난사로 35명이 희생되었다. 다음에는 어디서 어떤 테러가 터질지 중동과 북아프리카, 유럽은 초긴장 상태다. 또한 시리아 내전은 6년째 진행 중이고 미국이 새로운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맞이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국제 정세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신년에는 테러 정국을 움직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재를 이어간다. 인물을 이해해야 테러의 기원이 보인다.


지난해 12월25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북쪽 세드나야 마을의 유서 깊은 수도원에 한 부부가 나타났다. 산타 모자를 쓴 이 부부는 몰려든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리아의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와 그의 부인 아스마 알아사드였다. 이슬람교도인 알아사드 대통령은 매년 크리스마스에 기독교 신자들과 축하 인사를 나눈다. 인자한 얼굴만 보면 그가 시리아 내전 기간에 40만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그는 지난해 12월15일 휴전 합의에 따라 반군이 알레포에서 철수를 시작하자 ‘알레포 해방’을 선언했다. 하지만 알레포에서 가족 여섯 명을 데리고 터키로 탈출하던 칼리드 씨(43)는 “알아사드는 악마이고 도살자이다. 사람들을 죽이는 취미를 가졌으며 그것을 즐긴다”라고 말했다.

ⓒAP Photo
지난해 12월25일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왼쪽)이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고 있다.
1965년생인 알아사드는 2000년 타계한 부친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을 승계한 인물이다. 1971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29년간 집권한 하페즈는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그는 피에 물든 대통령 자리를 원래 장남인 바셀에게 넘기려 했다. 둘째 아들 바샤르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1988년 다마스쿠스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안과 의사가 되었다. 1992년 영국으로 유학해 런던의 웨스턴 안과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볼 때만 해도 그저 평범한 안과 의사였다.

1994년 다마스쿠스 공항 도로에서 장남 바셀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심장이 좋지 않고 노령이던 하페즈는 런던에 있던 차남을 급히 불러들였다. 2000년 아버지가 죽자 바샤르는 97.2%의 압도적 득표율로 시리아 제17대 대통령이 되었다. 정보통신 기술과 세계화에 관심이 많은 영국 유학파 대통령에게서 국민은 희망을 보았다. 그는 정치범 수백명을 석방하고 대중 정치집회와 출판의 자유를 허용했다. 알아사드의 아내인 아스마는 ‘사막의 장미’로 불리며 유럽에서도 인기가 많은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JP모건에서 투자분석가로 일하던 재원으로 2000년 알아사드가 대통령이 된 바로 그해에 25세의 나이로 결혼했다. 그들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부부였다.

환상이 깨진 것은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여파가 시리아에 미치면서부터다. 2011년 처음 시리아 남부 도시 다라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알아사드는 당황했다. 그래도 첫 대응은 긍정적이었다. 일련의 유혈사태 책임을 물어 다라 시장을 해임했다. 또한 아버지 때부터 48년 동안 유지해온 국가비상사태법도 폐지했다. 이 법은 독재를 유지한 근간이었다. 시리아는 민주주의에 한 걸음 다가서는 듯했다. 하지만 환상은 불과 하루를 못 갔다. 시리아 정부군은 국가비상사태법을 철폐한 바로 다음 날 또다시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했다. 바트당이 문제였다. 바트당은 아버지 하페즈 대통령 시절부터 든든한 독재의 방패막이였다. 1940년 창립한 바트당은 아랍사회주의 부흥당 시리아 지부를 말한다. 레바논을 비롯한 여러 아랍 국가에 바트당 계열의 정당이 있다. 사담 후세인도 바트당의 뒷받침을 받아 이라크를 통치했다. 바트당으로서는 국민이 정부를 이기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AFP
2000년 6월13일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막내아들 마헤르 알아사드(가운데).
사실 아버지 하페즈는 장남이 죽고 난 뒤 막내아들인 마헤르가 대통을 이을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다혈질이며 즉시 일을 처리하는 성격인 마헤르는 아버지를 꼭 닮았다. 하지만 당시 마헤르의 나이가 27세에 불과했다. 하페즈는 둘째 아들 바샤르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전 초반인 2011년 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을 때 시리아 정부 내부는 엉망이었다. 탈영하는 장교와 병사가 속출했다. 바샤르가 수도를 버리고 러시아로 망명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때 공화국 수비대장인 마헤르는 제4기갑사단을 이끌고 80%까지 반군에 장악되었던 수도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갔다. 믿어지지 않는 전투력을 발휘해 형을 지켜내고 반군을 조바르와 동부 고타로 몰아넣어 포위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정부군은 그나마 재정비를 할 수 있었고 대통령궁도 사수했다. 그는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명령한 주요 지휘관이기도 하다. 마헤르는 형의 하야를 막아내는 공로를 세웠다. 든든한 동생에게 의지한 바샤르는 바트당과 함께 시리아 국민의 시위를 진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수비대장인 동생이 시위대에 발포 명령

시위는 다라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제3의 도시 홈스에서도 수천명이 연좌시위를 벌였다. 평화시위를 벌이는 이를 향해 정부군은 무차별 발포를 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후 그는 반정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각종 반인도적 통치행위를 일삼았다. 그는 급격하게 잔인한 독재자로 변신해갔다. 알아사드 정권에게는 전통 우방인 러시아와 이란의 든든한 지원도 큰 힘이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는 2011년 3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체제가 유지되는 구조를 분석했다. 알아사드 일가를 중심으로 한 소수에 의한 극단적 권력과 부의 독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아랍의 봄’으로 무너진 다른 아랍 국가의 경우 엘리트와 다수 민중의 비율이 각각 1%, 99%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리아에서는 부유층이 0.1%이다. 특권층이 워낙 극소수라 일반 시민은 그들을 듣도 보도 못한다. 이처럼 격차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부가 지지 세력을 단단히 묶는 힘이다. 반군 조직은 경제적으로 빈약하며 서로 분열되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알아사드가 지금까지 오랜 내전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AP Photo
시리아 정부와 반군이 알레포 주민 철수에 합의하면서 철수가 재개되었다. 지난해 12월19일 버스를 이용해 알레포를 빠져나와 난민캠프에 도착한 주민들.
이슬람국가(IS)가 등장한 것도 알아사드에게는 호재였다. 내전 초기부터 알아사드는 시위대와 반군을 테러 분자라고 매도했다. 그래서 자신은 테러와 싸우는 ‘정의로운 대통령’이라는 선전전을 이어갔다. 마침 IS가 벌이는 잔인한 참수극과 외국인 납치가 서방세계의 분노를 사자, 알아사드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러시아와 연합해 공중에서 폭격하는 것을 모두 IS 토벌 작전이라고 포장했다. IS 조직원이 은신해 있다며 악명 높은 드럼통 폭탄을 민간인 거주 지역에 떨어뜨렸다(<시사IN> 제477호 ‘통폭탄에 찢기고 화학무기에 질식되고’ 기사 참조).

알아사드의 보좌관들은 미국이 다마스쿠스를 공습하거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승리는 자신들 것이라 확신했다. 미군과 연합군도 알아사드가 필요해졌다. 공습을 통해 IS를 쫓아내면 해당 지역을 한시적으로 점령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IS에 도로 빼앗길 수밖에 없다. 지상군 역할을 맡아줄 세력은 오로지 알아사드 대통령이 보유한 시리아 정부군밖에 없다. 그래서 미군과 연합군은 알아사드가 있는 다마스쿠스는 절대 폭격하지 않는다. 알아사드를 지원하는 러시아가 껄끄러워서만은 아니다.

알아사드는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치열하고 복잡한 내전 속에서 살아남았다. 시리아 국민의 일상은 초토화되었다. 아랍에서도 아름다운 나라에 속했던 시리아 주요 도시에는 유령만 배회한다. 아사하거나 폭격에 산산조각 난 시신이 방치되어 있다. 국민의 3분의 2가 고국을 등졌다. 수백만 난민이 유럽을 떠돈다. 알레포 주민은 매일 밤 마지막 메시지나 유언을 SNS에 동영상으로 남겼다. 정부군이 들어오면 이른바 반정부 세력 색출 작업으로 다시 피바람이 불 것을 두려워해 지금껏 버텼던 주민조차 알레포를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이다.

지난해 12월21일 시리아 반군과 알레포 주민을 이송하는 마지막 호송대가 알레포를 떠날 준비를 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호송 차량 수십 대가 도착했다. 알리샤 씨(28)는 이날 갓 돌이 지난 아기를 안고 버스를 기다렸다. 남편과 큰아들(당시 3세)은 6개월 전 폭격을맞아 사망했다. 그녀는 “작은아이라도 살리려고 어떻게든 알레포를 나가려 한다. 남은 가족이라곤 이 아이뿐이다. 아기가 크면 알아사드라는 괴물이 우리 가족을 파괴했다고 말해주겠다”라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IS보다 7배나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내전에서 40여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난 책임은 대부분 IS나 반군이 아니라 정부군이 져야 한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 인권네트워크’에 따르면 2015년 1월부터 7월까지 IS가 죽인 시리아인은 1131명이고 알아사드의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가 죽인 사람은 7894명에 달한다. 알아사드가 IS보다 7배나 많은 사람을 죽였다. 런던 소재 국제전략연구소(IISS) 중동 전문가 에밀 호카옘은 “2011년 이후 시리아에서 발생한 사망과 파괴의 주범은 알아사드 정권이다”라고 말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6일 영국 <선데이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무차별 폭격으로 아이들이 희생당한 데 심적 부담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환하게 웃으며 “나는 일상적으로 잘 자고, 일과 운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라고 답했다. 그는 또한 “시리아 시민 수만명이 희생당한 건 테러리스트 잘못이다. 우리는 자선 활동이 아니라 전쟁 중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 앞서 알아사드는 잿더미에서 구출된 뒤 응급이송 차량에 멍하니 앉아 있던, 세계를 울린 다섯 살 옴란 다크니시의 사진도 가짜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그는 “시리아 국민은 극단주의 아니면 나를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어떤 거짓말을 하든지 시리아 국민 대다수는 알아사드가 장기 집권을 위해 반정부 세력을 유혈 진압하고 내전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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