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콘크리트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돼지 한 마리가 내려간다. 아래쪽에도 똑같은 계단이 있는데, 뒤집힌 돼지가 올라가고 있다. 뭐지? 이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림은? 돼지는 저금통 혹은 고구마와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아이들 공작품처럼 귀엽고 익숙한 형상이라, 이 부조화가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책의 텍스트는 얼핏, 반대말을 가르치는 것 같다. ‘돼지, 양탄자 위에/ 돼지, 양탄자 아래에.’ 계속 이런 식이다. 돼지 적다/ 돼지 많다?, 돼지 없다/ 돼지 있다, 돼지 앞에 돼지/ 돼지 뒤에 돼지?, 돼지 느리다/ 돼지 빠르다…. 반대말을 그냥 가르치면 그만이지 봉숭아학당의 영구도 아니고, 이런 싱거운 말 몇 마디로 책을 만들었다고? 독자는 어이없어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림책의 예술이다. 그림과 디자인이 합해져 이 싱거운 말에 놀라운 지평과 깊이가 부여되는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반전의 단초는 물음표다. 이 책에서는 질문이 많이 던져진다. ‘적다/ 많다’ 페이지를 보자. 왼쪽 페이지에는 돼지 달랑 3마리, 오른쪽에는 30마리가 넘는다. 당연히 오른쪽 페이지의 돼지가 많다. 그런데 ‘많다’가 아니라 ‘많다?’라니. 이 질문은 ‘답이 뭐야?’ 가 아니라 ‘정말이야? 과연 그럴까?’이다. 답은 접지로 되어 있는 왼쪽 페이지를 펼치면 그냥 나온다. 펼쳐보니 100마리도 넘어 보이는 돼지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쪽 돼지가 많은 것 같아? 보이는 대로 단정 짓는 게 아냐, 안을 펼쳐보고 뒤를 넘겨다보면 그게 아니라니까! 돼지들은 그런 말을 한다. 이 멍청아! 이건 책을 읽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세상만사에는 이면이 있기 마련이니 그걸 살펴야 하는데 나는 늘 그걸 놓친다. 납작하게 한 면만 보고는 달려들어 코가 납작해지기 일쑤다.

〈돼지 안 돼지〉 이순옥 지음·반달 펴냄
물음표를 되돌려주는 당찬 그림책

접지 속에 숨은 돼지의 일침에 이것 봐라! 싶은 작은 탄성이 나온다. 기대에 차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다. 돼지들은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가깝고 먼 것,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 깊고 얕은 것, 높고 낮은 것, 길고 짧은 것…. 이 모든 개념들이 물음표와 함께 뒤집어진다. 내가 본 그림책 중 물음표를 가장 영리하게 구사한 책이 아닐까. 옆으로 접고, 위아래로 접고, 반만 접고, 세 번 접고, 페이지마다 온갖 접지 기술을 구사한 디자인도 감탄스럽고 즐겁다. 텍스트는 간단하지만 책의 구조는 간단하지 않고, 그림의 색조는 가라앉아 있지만 메시지는 통통 튀어오른다. 이렇게 입체적인 감흥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책이라니!

표지의 꼬리 무는 계단이 궁금해 뒤져보니 ‘펜로즈의 계단’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대단히 고차원의 입체 같은데 사실은 2차원에서만 가능한 개념이라니, 이 아이러니에 또 한 번 즐거워진다. 영화 〈인셉션〉에도 나왔다는데 어지러웠던 그 영화보다 이 그림책이 훨씬 명료하고 재미있다. 이게 첫 번째 그림책이라는 당찬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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